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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이야기

3년 만에, 근황

                                                                                                             써니킴, 풍선, 2008.





1.  조규찬

조규찬의 두 곡.
'perhaps love'와 '잠이 늘었어'.

딱히 추억이 있는 곡들도 아니다.
미친듯이 들었던 노래들도 아니다.
다만 마법 같은 순간들이 있는 곡들이다.

두 곡이 내게는 사랑의 전주와 후주처럼 느껴진다.
'perhaps love'에 나오는 '정말 사랑이면'이라는 가사는 시작이고,
'잠이 늘었어'에 나오는 '잠이 늘었어'라는 가사는 끝이다.

물론 두 곡이 바뀌어도 어색할 것 없다.
사랑이야기에서 시작과 끝이 바뀐다는 것, 별 거 아니다.




2. 목소리 - 김영하, 김애란

소설은 내게 편지이기도 하다.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김영하 작가를 좋아한다.
높은 톤의 얇은 목소리를 상상하며 그의 소설을 읽어왔다.

이이언의 앨범 속에서, 팟캐스트를 통해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맥스웰 뺨치게 섹시한 목소리.

이동진이 진행하는 라디오인 '꿈꾸는 다락방'에 김애란이 나왔다.
나긋나긋하면서 동시에 위트 있는 목소리.
기분 좋아지는 목소리이다.

예전에 어두운 조명의 술집에서 밝은 옷을 입고 환하게 웃어주던 김애란 작가를 잊을 수 없다.
그 날 수많은 작가들을 봤지만 내 기억 속에서 김애란 작가는 그야말로 환하게 빛이 난다.

노래 듣듯이 김영하 작가와 김애란 작가의 목소리를 듣다가 그들의 소설을 읽는다.
그들의 글 옆에 알레그로, 모데라토, 아다지오를 줄마다 표기해야만 할 것 같다.




3. 목소리 - 한예리

한예리를 좋아한다.
윤성호 감독의 인터넷 버전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에 나오는 한예리는 귀여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강진아 감독의 '백년해로외전'을 보고나면 한예리는 관객들을 위로하기 위해 태어난 배우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작은 체구의 배우이지만 그녀의 존재감은 두 눈에만 담기에는 벅찰만큼 거대하다.

정엽이 진행하는 라디오 '푸른밤'에 '여배우들'이라는 코너가 있다.
여배우를 초대해서 이야기를 듣는 코너이다.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올 때마다 듣곤 한다.

'코리아'를 홍보하러 나온 한예리는 자신이 연기한 북한탁구선수에게 음성편지를 보낸다.
말을 시작하기도 전에 한예리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울먹이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녀의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말의 행간 사이에서 그녀의 표정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만 들었지만 한동안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도, 표정도, 목소리도 모두 한예리가 되어버렸다.




4. 잊거나 신격화

'사람은 어딘가 닿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을 때, 종종 그것을 신격화시킨다. 더불어 아파한다. 그 아름다운 것에 닿을 수 없다는 사실로 스스로를 욕하고 꾸짖어 괴롭힌다. 이 끔찍한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 정체를 온전히 파고들어 확인하는 것이다. 그 천박하고 별 것 아닌 존재를 속속들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애초 가질 수 없고 사실 가질 필요도 없는 것들을 논거로 자학하지 않을 수 있다. 여기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정체를 온전히 파고들었더니 이건 거의 계왕신급이야, 에네르기파나 태양권 따위로는 어찌해도 어찌할 수가 없는 거지, 이런 썅 이래선 도저히 천박하다 웃어넘길 수가 없어. 뭐, 그럼 계속 신으로 모시는 수밖에. 무언가를 잊고 싶어 안달난 모든 낭인들에게'

허지웅 평론가의 글이다. 

설레는 것이 두렵다는게 얼마나 비참한 감정인가.
상처받는게 두려워서 아무 것도 시작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암담한 합리화인가.

설렘이 찾아오면 그것을 쪼개고 쪼개서 이것이 설렘이 아닐 것이라고 합리화시키는 순간들.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무뎌졌음을 느끼고 안심한다는 것.
그것은 안심일까 안타까움일까.

그리고 다시 그 대상을 만난다.
혼자서 설렘을 품고 웃을 시간에 애써 부수고 밟아가며 없앤 감정인데, 그 대상의 작은 한 마디와 표정에도 툭하고 그것들은 언제 죽었냐는듯이 살아나버린다.

이제 방법은 하나이다.
내 감정을 인정하고 온전히 사랑하는 것.
그리고 상처받는 것.

잊고 싶어서 안달났다는 말조차도 지극히 방어적인 발언이다.
그냥 잊는다는 핑계로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떠올리다보면 잊겠다는 말부터 가장 먼저 잊어버리게 하는 존재에게 얼마나 부질없는 몸부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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