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 (The Unforgiven , 2005)

Movie 2018.06.17 21:35



연상호 감독의 단편 애니메이션 '창'이나 임태규 감독의 '폭력의 씨앗' 같은 군대 관련 영화는 어쩔 수 없이 과하게 몰입하게 된다.

군필자에게 군대는 삶에서 너무 큰 부분을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2년이란 시간을 부조리한 시스템 안에서 보내는 건 여러모로 안 좋은 사회화의 경험이다.


군대에서 가장 많이 배우는 건 합리화다.

거지 같지만 버티고, 버티다 보면 어느새 내가 증오하던 이들과 닮아있음을 발견하는 것.

하지만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는 것.


윤종빈 감독은 데뷔장편에서부터 영화가 캐릭터싸움이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

매력적인 캐릭터들 덕분에 뻔할 수 있는 군대이야기에 신선함이 더해진다.

비교적 신인 시절의 하정우를 보는 것도 '용서받지 못한 자'의 매력이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들은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여주고, 그 캐릭터들을 곱씹다 보면 결국 어떤 부조리한 세계에 진입하게 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연출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개봉예정작인 '공작'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윤종빈 감독의 모든 작품을 좋아하진 않지만, 적어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볼 수 있다는 확신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기대된다.


군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선택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데, 쓴맛이 크다.

아마 평생 곱씹어도 비슷한 끝맛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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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닝 (BURNING , 2018)

Movie 2018.06.17 21:24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단, '밀양'은 좋은 짜임새에 비해 감흥이 덜했다.

'버닝'은 '밀양'만큼이나 내게 별 감흥을 못 준 작품이다.

심지어 짜임새에 있어서도 의문 가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 이 영화가 이창동 감독이 아닌 신인감독의 영화였어도 과연 '버닝'이 지금만큼 좋은 평을 받았을지 의문이다.

완벽에 가까운 그의 전작들의 여운을 머금고 봤기에 그나마 이 영화에 호의적인 게 아닌가 싶다.


가장 놀란 부분이 이 영화가 청춘에 대해 도식적으로 다룬 부분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에서 도식적인 설정들을 본다는 게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가 청춘을 완전히 이해할 순 없어도 이런 도식적인 설정으로 극을 전개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예상가능한 지점들, 윌리엄포크너나 위대한개츠비 등 인용된 텍스트의 작위성, 캐릭터가 입으로 씹는 대사가 아니라 연출자의 대리자로서 뱉는 듯한 대사들.

캐스팅조차도 배우의 개성이 작위적인 캐릭터와 매치되었을 때 어색하지 않은 인물로만 캐스팅했나 싶기도 했다.


영화의 모호함은 매력이다.

그런데 연출자조차 답을 안 내린 채 모호함을 무책임하게 던지는 느낌이다.

정당화되고 매력적인 모호함이 아니라, 무책임하게 얼버무리는 당혹함 같아서 당황스러웠다.

이 극의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창동 감독이라면 멋진 이유가 존재할거야, 라는 가설 혹은 도식적인 해석 뿐이다.

평론가들의 다양한 해석을 보고 의미부여도 가능하겠으나, 평론가의 평으로 영화가 완성되면 그건 연출자의 영화가 아니라 평론가의 글이 더 큰 공을 가져가는 게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 매혹적인 장면들이 분명 존재한다.

자연광을 고집한 것도 한 몫 할 거다.

다만 아름다운 장면들조차 감독보다 홍경표 촬영감독의 영향력이 더 크게 느껴진다.


'박하사탕', '오아시스', '시'는 내게 잊을 수 없는 작품이다.

'버닝'이 보여준 청춘은 전혀 공감할 수 없이 중년이 먼발치에서 그려낸 청춘에 대한 편견 같다.

부디 이창동 감독의 차기작에서는 그가 가장 잘 이해하는 세게에 대해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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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花樣年華 , In The Mood For Love , 2000)

Movie 2018.06.17 21:05



왕가위 영화를 처음 본 게 거의 10년 전이다.

왕가위에 빠져서 거의 모든 영화를 다 봤다.

데뷔작인 '열혈남아'부터 2004년에 나온 '2046'까지 단숨에 봤기에 어쩌면 작품마다 푹 빠져있을 시간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의 최고작으로 알려져있다.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이 없어서 내가 이상한가 싶었다.


10년이 지나 다시 본 '화양연화'는 거의 새로운 영화다.

내가 왜곡해서 기억한 장면도 있었고,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숨에 걸작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내겐 '중경삼림'의 감성이 더 좋다.


장만옥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했다.

양조위는 러닝셔츠를 입었을 때 가장 멋진 사람 중 하나다.

장만옥의 다양한 의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 있다.

영화 초반엔 단색 위주의 의상을 입다가, 양조위와 가까워진 뒤부터 화려한 프린팅의 옷으로 바뀌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장만옥은 두 번 운다.

남편과의 헤어짐을 연습하면서, 양조위와의 헤어짐을 연습하면서.

두 번 모두 상대역은 양조위고, 옆에서 안아준다.

슬픔을 연습하는 순간에 옆에 있어준 사람,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준 사람.


그들이 사랑을 연습했다면 달라졌을까.

가설을 만드는 일은 겨우 마침표를 찍은 일에 다음 문장을 덧대는 일과 같다.

추억의 흔적들이 마주치면 어느새 새 문장을 적는다.


'첨밀밀' 속 장만옥과 여명에게 등려군의 음악이 특별하듯, 이별을 앞둔 장만옥과 양조위 사이에서 '화양연화'라는 제목의 곡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서로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공유하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더 아름답다.


그들은 주변의 이목과 서로의 배우자로부터 반면교사한 부분까지 서로를 속박하는 부분이 많다.

그들이 도망쳤다면 행복했을까.


지금 다시 보니 2046이라고 적힌 양조위의 방 앞 복도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 속 빨간방들을 연상시킨다.

그 빨간방 안에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표현들이 담겨있을 것만 같다.


장만옥와 양조위를 제외한 인물들은 거의 안 나오고, 등장해도 뒷모습 정도만 나온다.

등장한다 해도 두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때만 나온다.

두 사람의 얼굴 클로즈업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두 사람의 표정과 말투 등으로 수많은 디테일이 채워진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두 배우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멋진 연기를 담은 작품이다.


비밀이 생기면 나무를 파내서 그 안에 비밀을 말하고 진흙으로 덮듯, 캄보디아 사원에서 양조위는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채운다.

비밀을 말하는 양조위의 뒷모습은 마치 연인에게 입을 맞추는 사람 같다.

그는 장만옥의 삶에 있던 외로운 부분을 충실하게 채워준 사람이다.


비밀을 돌 사이에 심고 진흙으로 채워도, 진흙의 잔해를 따라 그 비밀은 흘러 나올 거다.

그 흙이 일부가 되어 대지가 생겨나고, 누군가는 비밀이 묻어난 대지를 걸을거다.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비밀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수많은 비밀이 지금 이 순간도 일어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나 과거의 집에 찾아온 장만옥이 양조위의 방을 보자 울컥한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그녀가 걷는 대지 위에서 아무리 태연하게 지나도, 가끔 발목을 시큼하게 할만큼 불쑥 튀어나오는 비밀의 순간이 있을 거다.

사랑이지만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순간.

그녀의 마음의 여백에 양조위가 들어선다.

진흙의 잔해처럼 그와의 추억이 새어나온다.

함께 먹던 국수, 그와 만날 순간을 상상하며 고른 의상, 그와 쓰던 무협소설의 장면들.


우린 양조위가 돌에 속삭인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장만옥은 그 말들을 음절 하나하나까지 알 수 있을 거다.

비밀을 말하고 싶은 마음 안에는 비밀 속 주인공인 그녀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테니.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을 말하는 방법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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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종사 (一代宗師 , The Grandmaster , 2013)

Movie 2018.06.17 21:03



사랑하는 이를 오랜만에 만난다면 단숨에 달려가게 될까.

막상 그 순간이 되니 오히려 주춤하게 된다.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가 내게 그랬으니까.

내게 영화의 첫사랑과 같은 그의 신작을 오랜만에 보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대종사'를 보면서 가슴 벅찼던 이유는 내가 보고 싶었던 왕가위의 지점들이 영화 안에 담겨있었다는 거다.

'화양연화'의 변주로 보이는 사랑의 무드, 이미지로 만드는 서사, 서정을 자아내는 화면의 디테일, 촬영과 음악까지 그동안 그의 전작에서 곱씹던 지점을 신작을 통해 봐서 마음이 좋아졋다.


무공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지킨다'는 것의 가치에 대한 영화다.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지키려 하고, '일대종사'에서는 그게 바로 무공이다.


필립 르 소드의 촬영은 크리스토퍼도일 못지 않게 매혹적이었다.

미술과 편집에 있어서 장숙평의 손길이 화면에서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뭉클했다.

'화양연화'와 '2046'의 음악도 맡았던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음악은 굉장히 다양한 테마가 적절하게 쓰였다.


장쯔이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만하다.

편집 논란이 있었을 만큼 양조위의 분량이 주연치고 그리 많지 않고 장첸은 뜬금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만큼 장쯔이의 비중이 큰 영화다.


장쯔이와 양조위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술로 대립한다.

그리고 잠시 스치는 그 순간에 사랑을 느끼고, 그 순간은 마치 '아비정전' 속 장국영와 장만옥의 시간을 연상시킨다.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단단한 찰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후반부에 장쯔이가 양조위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왕가위 장면에서도 손을 꼽을 만큼 아름다워서 울컥했다.

그녀가 삶에서 사랑을 비롯해서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얻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라도 가치 있는 삶이다.

그녀의 대사처럼 후회 없는 삶이란 재미 없을 테니까.

상실의 연속이어도 전진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숭고함, 희생으로 지켜온 어떤 가치에 대한 메시지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송혜교는 중국어 대사를 다른 사람 목소리로 더빙해서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아예 대사 자체가 별로 없는 설정의 캐릭터였다.

장첸은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많지만, 무예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중 한 축이라고 합리화 하면서 애써 개연성을 만들며 봤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이 무협 영화이지만 무협보다 드라마를 강조하듯, '일대종사'도 무공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드라마다.

원화평의 무술은 멋지지만, 무술보단 드라마에 훨씬 더 눈이 갔다.

순간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클로즈업이나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화면연출은 왕가위가 최고다.

어떤 화려한 액션시퀀스보다도 좋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본 게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서 그의 전작들을 다시 봐야겠다고 느꼈다.

'일대종사'를 시작으로 다시 보기 시작할 건데, 얼만큼 다른 감흥을 줄지 궁금하다.


무술에 대해 말하지만 결국 사랑에 대한 말한 것처럼, 왕가위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소재로 사랑을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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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리 굿 걸 (Very Good Girls , 2013)

Movie 2018.06.17 20:58


어떤 배우에게 꽂히면 취향상 딱히 안 봤을 영화도 챙겨보게 된다.

어벤져스에 나온 엘리자베스 올슨이 흥미로워서 '베리 굿 걸'을 봤다. 

다코타패닝이 나온 영화는 안 보고, 엘르패닝이 나온 영화는 보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랜만에 다코타패닝이 나오는 영화를 봤다.


김태용 감독의 '여교사'가 떠올랐다.

두 여자캐릭터의 유대감으로 충분히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극인데, 두 캐릭터 사이에 도구적이고 평면적인 남자캐릭터 하나가 끼어들면서 극이 급격하게 무너진다.

삼각관계가 나오는 영화는 많지만 매혹적으로 그려낸 영화를 보기 힘든건 감정선을 밀도 있게 그려내지 않아서다.


무엇보다 두 배우의 매력이 크다.

배우의 매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영화다.

두 캐릭터의 우정이 다소 작위적인 부분이 있음에도 부족한 논리를 배우의 매력이 채워준다.


내겐 '우주전쟁'의 모습이 여전히 선명한 다코타패닝의 필모그래피가 어떤 결을 가지고 나아갈지가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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