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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콜콜한이야기

6월에는 점포정리하듯 글을 뱉어내지요

 




1. 블로그

마치 점포정리하듯 이렇게 글들을 쭉쭉 쓰려고 하니 뭔가 어색하다.
난 영원히 내 이야기 하는 것을 어색해할 것 같다.

블로그도 결국 성실함이 필요하다.
맘 먹고 안 쓰면 밀리게 되어 있다.

네이버검색창에 내 블로그 주소를 입력해보았다.
내 블로그에 있는 글을 링크 걸어두고 '이 블로거 의견에 공감'이라고 한 이들이 있었다.

신기했다.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나의 생각에 공감해준다는 것은 멋진 일이다.
애초에 내가 블로그를 시작한 이야기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관리 안 해도 매일 이리저리 유입되어 블로그에 와주는 이들이 고맙다.
페이스북보다 훨씬 든든한 느낌이다.
'좋아요'보다 훨씬 큰 응원을 받은 느낌이다.



2. 어른

초등학교 때 불소를 했었다.
충치예방이고 뭐고 간에 내 입에 불소를 넣어주면 그걸 몇 분간 입에 물고 있어야하는데, 지금도 그 역한 기분이 생생하다.

그래서 그냥 먹었다.
옆에 아이들 몇 명이 불소를 꿀꺽하고 삼키는 것이다.
아, 삼키면 이것은 내 입에서 사라지고 그렇다면 역한 기분이 없어지겠구나.
나도 따라했다.
그렇게 난 불소를 먹으며 성장했다.

덕분에 난 지금도 내가 뭔가 잘못하면 모든 것을 불소 탓을 하고 싶어한다.
사실 불소는 방금 생각난 것이고, 뭔가 나 자신의 못난 점이 생기면 괜히 남탓하고 싶어져서, 남이 아닌 나 자신 속에 있는 낯선 존재를 찾는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욕과 사랑을 함께 먹으며 소화시키다 보니 탄생한 게 나란 놈이다.
난 이렇게 자라버렸다.

한 때는 오이를 먹으면, 가지를 먹으면, 피망을 먹으면 어른이 될 줄 알았다.
뭔가 게임에서 스테이지 클리어하듯 하나씩 먹으면 될 줄 알았는데, 만약 그렇게 해서 어른이 된다고 해도 슬픈 것이고, 안 된다고 쳐도 슬프다.

그러므로 채소는 슬프다.
어른은 채소다.
피망이 피처럼 새빨갛게 보이는 것은 내 기분 탓일 것이다.
오이는 영원히 먹지 못할 것이다.

난 어른이 될 팔자가 아닌 것이다.
아니, 될 수 있다고 해도 안 될 것이다.
결론은 난 오이를 먹지 않을 것이다.



3. 시간

시간 빠르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시간이 빨라진게 아니라 시간에 대한 감각 자체가 달려진 것 같다.
전에는 몸 구석에 감춰둔 스위치를 눌러야 겨우 가던 시간이, 이제는 누가 스쳐지나만 가도 스위치 온이 되어버린 것 같다.
뭔가 성감대 발견하듯 시감대를 발견한 느낌이다.
시감대, 어감이 썩 좋지는 않구나.

과거를 회상하다보면 빨라진 시간이 좀 더 많이 와닿는다.
내가 상상했던 미래의 그 지점에, 나는 벌써 와버렸구나.

굳이 일기장을 펼쳐보지 않아도, 작년 이맘 때의 내가 지금과 같은 나를 기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나를 마주한다면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는 말보다는 왜 시키지도 않은 기대를 하냐고 따지듯 말할 것 같다.
저는 학습능력이 없습니다, 라는 말도 덧붙여야겠다.

솔직히 나는 과거의 내가 보일 때마다 토악질이 날 것 같다.
난 과거의 영광에 취해서 현재를 못 보는 것처럼 멍청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다행히도 나는 과거의 영광이 없다.
뒤를 돌아보면 흑의 장막이다.
오만해질 끼가 다분한 내게, 흑역사는 참으로 좋은 제어장치인 것 같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내가 내 자신에게 기대 안 하면 누가 내게 '기대'라는 감정을 품겠는가.
한예슬 노래처럼 '그대는 달라요, 날 기대하게 해.' 라고 누군가 말해오면 그것은 또 얼마나 부담이겠는가.
기대와 실망의 연속 속에 나의 시간은 부지런히도 간다.



4. 사진

자신만의 즐겨찾기 목록이 있지 않은가.
나의 즐겨찾기 목록에는 다음에서 '어쿠스틱라이프'를 연재하는 '난다'라는 작가의 블로그가 있다.
그녀의 웹툰에도 등장하는 아기의 실제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녀의 블로그 속 아기는 점점 자라나고, 나도 그 자라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몇 해 전에 아버지께서 집에 있는 사진첩들이 공간만 차지하고 먼지 쌓인다고 모조리 다 컴퓨터에 스캔해버리라고 시키신 적이 있다.
거의 며칠에 걸쳐서 스캔을 해두었는데, 당시에는 사진이 너무 많아서 힘들어했던 기억이 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해두길 잘했다.
접근성이 훨씬 높아졌다.
가족과 물리적으로 가까워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원래 6월 초에는 오전에 항상 전시회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시간에 집에 있는 사진들을 보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려낸 시간이 아니라, 사진 속에 담긴 내 시간을 바라보는 일이라고 느꼈기 떄문이다.

사진만 봐도 울컥하는 순간이 있다.
스캔한 사진 폴더 속에는 어머니의 젊은 시절과 어린시절 나의 사진이 섞여있다.
막무가내로 섞인 그 사진들을 보다보면,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희생한 것들이 너무 선명하게 드러난다.

최근에 어떤 잡지에서 '사람에 휘둘리면 하수다' 라는 말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나는 영원히 사람에게 휘둘릴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서 말이다.
난 누군가의 시간을 먹고 자란 존재이다.
그들의 시간을 먹고 이렇게 거대한 몸을 가지게 되었는데, 어떻게든 그들을 위해서 꾸역꾸역 살아가야하지 않겠는가.

사진 속의 나는 자라날 수록 웃음이 줄어든다.
동생과의 거리는 사진으로만 봐도 멀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동생과 같은 옷을 입고, 누가 봐도 형제인 것을 알텐데 '이 아이는 내 동생이에요'라고 말하며 손 붙들고 다니던, 그것이 당연하고 부끄럽지 않은 시절의 내가 사진 속에는 있다.
내가 한 때 그런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사진만이 알고 있다.

동생에게 '너 이때는 참 귀여웠는데'라고 하면 동생은 짧게 '미친놈'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는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눈다.
난 이런 시간이 어릴 적 우리 형제가 손을 붙들고 다니던 방식을 최신 업데이트한 버전이라고 믿고 있다.


5. 언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니, 가 있었으면 좋겠다.
예전에 희곡분과에서 항상 여자들 사이에 있다보니 나도 모르게 실수로 누나들에게'언니'라고 말했다가 엄청 민망했던 기억이 난다.
한 번 실수를 하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아예 '언니'라는 단어를 입에서 강제하차시키고 살았지만.

누나가 아닌 언니를 가지기 위해서는 제약이 무척이나 많다.
일단 난 남자인 것에 굉장히 만족하고 있는데, 언니를 가지려면 내가 여자가 되어야한다.
사실 내가 언니를 가지고 싶은 이유는 여자와 여자가 맺는 그 관계가 무척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모녀관계이고, 그 다음이 언니와 동생이라고 생각한다.
여자와 여자가 맺는 관계는 언제 봐도 흥미롭다.

주변 누나들에게 언니가 되어주겠냐고 물은 뒤에 성전환 수술을 하고 나타나면 그들은 생전 내겐 보여준 적 없는 표정으로 날 볼 것이다.
그런 순간의 재미를 위해서라도 언니를 가지게 되는 것은 무척이나 유쾌한 순간이 될 것이다.
내겐 보이면 안 되는 표정이라고 규정한 그런 표정이 툭하고 튀어나올 것이다.
가장 그로테스크한 순간을 떠올리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내가 언니를 가질 수 있게 되는 순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
언니를 가진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이 변함을 뜻한다.
동생팔불출인 내게 동생이 나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은 썩 유쾌한 상상이 아니다.
난 형이라는 포지션이 무척이나 마음에 든다.
다만 그 위에 언니가 있기를 바랄 뿐.
물론 다른 이가 아닌 오직 내 동생만의 형일 때가 좋다.

난 내 동생이 내 블로그나 일기 따위에 관심 없는 게 참 좋다.
우린 또 서로 욕하면서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을 거이다.
그것은 우리 둘만 가능하다.
난 내가 내 동생의 언니가 될 일이 없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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