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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악인 (悪人, Villain, 2010)



이상일 감독의 '훌라걸스'를 볼 때도 느꼈던 점이지만, 대사를 사용하지 않은 장면들이 훨씬 좋게 느껴진다.
대사보다도 인물들간의 구도나 표정만으로 감정을 끌어내는 연출에 능한 감독이 이상일이라고 생각한다.

'악인'은 좋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살인사건과 러브스토리라는 두 이야기의 균형에 있어서는 조금 아쉬운 면이 있다.
후반부의 대사들은 너무 직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두 이야기 중에 한 이야기를 주축으로 다른 이야기는 그 안에 녹여내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확실히 대사들이 오가는 장면들보다는 히사이시 조의 음악에 맞춰 말없이 표정과 구도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들이 좋았다.

초반부의 살인 사건 자체가 흥미로운데, 금방 러브스토리로 넘어가고, 또 그 러브스토리는 끝이 너무 명확한 이야기라서 흥미가 떨어지지 않았나 싶다.
후반부에 감정에 호소하는 장면들은 몰입할 수록 피로함을 느끼게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연기자들의 공이 크다.
후카츠 에리의 연기는 단연 돋보인다.
너무 과잉될 수 있던 영화가 끝까지 흘러갈 수 있었던 것도 후카츠 에리의 섬세한 감정표현 덕분이다.

츠마부키 사토시는 살인을 저지른 캐릭터이지만 약한 내면을 가졌다는 점에서는 이전 출연작들의 느낌도 가지고 있고,
오카다 마사키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 속 그 순둥이가 맞나 싶을만큼 철없고 악한 캐릭터를 연기한다.

후카츠 에리와 함께 이 영화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두 조연배우인 키키 키린과 에모토 아키라이다.
영화 초반에 에모토 아키라가 영안실에서 자신의 딸의 시체를 확인한 뒤에 발을 덮어주는 부분은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가장 조용한 장면임에도 감정적 울림이 컸기에, 이 톤을 좀 더 살렸으면 어땠을까 싶었다.

평소에 뉴스를 보면서도 의아한 점이 누군가가 죽으면 그의 가족이나 이웃들에게 그에 대해서 묻곤 한다.
과연 가족이나 이웃들이 그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오히려 사회적으로 친밀함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더 솔직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치유와 소통의 기적에 대한 영화들에는 낯선 이가 나타난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이와 소통을 하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한다.
그 어떤 배경도 존재하지 않는 낯선 이와의 만남이야말로 솔직해질 수 있는 여지가 큰 관계가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진짜 악인이 누굴까라는 영화의 화두보다도, 진실한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된다.
내 진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