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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북촌방향 (The Day He Arrives, 2011)



항상 의문이다.
난 '해변의 여인'부터 시작해서 홍상수의 영화를 보았다.
점점 그의 영화가 좋아졌다.
내가 나이를 먹는 것인지, 속물이 되어가는 것인지, 영화를 자세히 보게 된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홍상수 영화를 재미있게 본다는 것이 내게는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왠지 단숨에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홍상수의 영화가 좋은 이유 중에 하나는 평론가들에게도 홍상수의 영화는 좋은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씨네21에서 홍상수 영화를 보고나서 그의 영화에 대한 평론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좋은 텍스트인만큼 좋은 평론글들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내게 홍상수는 항상 우연을 말하는 감독이다.
개연성 대신 우연으로 묶인 이야기, 아니 이야기라고 하기도 모호하다.
서사보다는 정서로 진행된다는 느낌이다.

가장 빛나는 배우는 김보경이다.
김보경의 필모그래피에서도 앞으로 가장 빛날 작품이 아닐까 싶다.
유준상과의 잠자리에서 보여준 표정이나 눈빛, 대사들은 김보경을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한다.

유준상은 이제 완전히 홍상수의 페르소나가 되었다.
그가 영화 마지막에 보여주는 표정은 섬뜩하기까지 하다.

그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시종일관 낄낄거리며 보았지만, 역시나 보고나면 부끄러워진다.
이 영화는 '옥희의 영화'만큼이나 슬프고 더불어서 무섭기까지 하다.
'올드보이' 속 오대수가 써놓은 악행의 자서전을 웃으며 읽어주는 느낌이랄까나.
귀여운 여자들과 꼰대 남자들의 속물적인 모습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왜 이리 재미있고 찝찝한지.

영화의 영문제목이 '그가 도착한 날'이다.
영화 마지막에 그는 도착해버린다.
몇 명의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고, 그 중 누구는 기억도 잘 안 나고, 누구는 전에는 잘해줬는데 지금은 시큰둥해서 섭섭하기도 하다.
찰칵 소리와 함께 그는 사진 속에 담긴다.
과연 이 사진을 다시 살펴볼 일은 있을까.
이 남자는 이제 이 사진을 다시 들춰보기 전까지 완전히 잊혀진 채로 살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사진을 들춰보고서도 이 사람이 누군가 싶을지도.

영화 마지막에 나온 고현정의 표정은 남자의 모든 것을 안다는 표정이다.
짧게 나오지만, 그 짧은 장면에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여배우가 고현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에 관한 영화이고, 그래서 슬프고 무서웠다.
꼰대 같이 느껴지는 그 무수한 거짓말들과 몇몇 우연들, 그것들이 사람을 기억해낼 수 있는, 기억했다고 착각한 채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 슬펐다.

난 여태까지 몇 번이나 잊혀졌을까.
기억된 횟수보다 잊혀진 횟수가 많은 것은 모순일텐데, 그 모순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