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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마카담스토리 (MACADAM STORIES, Asphalte, 2015)

 

올 해의 마지막날.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12월 31일까지 사용가능한 영화표를 얼른 써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개봉작 중 보고 싶은 영화 두 편을 예매했다.

아침에 예매하고 잠들었다가 일어나서 급하게 사과를 씹어먹으면서 코엑스 메가박스로 갔다.

 

사실 개봉한 줄도 몰랐다.

아예 정보도 없이 보러갔다.

이자벨위페르라면 믿어도 될테니.

 

하나의 테마 안에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는 방식을 좋아한다.

이냐리투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을 테마로 한 '아모레스 페로스'나 인종 문제에 대해 다룬 폴해기스의 '크러쉬'도 같은 이유로 좋아한다.

 

'마카담스토리'는 한 주택 안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배명훈 작가의 소설을 비롯해서 (물론 우주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런 형식의 이야기는 워낙 많긴 하지만,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과거에 유명배우였던 여배우가 옆집소년을 만나서 자신의 영화를 다시 보고 오디션을 준비한다.

아들을 수감시설에 보낸 여자가 우주에서 불시착한 남자를 자식처럼 대한다.

휠체어를 타고 몰래 엘리베이터를 타는 남자가 우연히 만난 간호사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톤 자체는 정적인데, 위트도 있고 장면 자체의 매력이 커서 지겹지 않다.

한 건물에 사는 것 이외에는 딱히 공통점도 없다.

다만 이들은 외롭고, 누군가를 만나 위로받는다.

모든 현대인을 아우룰 수 있는 테마로 이들을 묶을 수 있다.

건물에 사는 이들이 듣는, 마치 아이 울음 소리 혹은 외계인의 소리 같은 소음의 정체는 아마 이들의 일상에서 발생하는 균열일지도 모른다.

 

앞에서 이 영화처럼 하나의 테마 안에 여러 인물이 얽히는 형식을 좋아한다고 밝힌다.

인물들의 관계에 있어서는 우연히 만난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방식의 영화를 좋아한다.

김태용 감독의 '만추'나 '가족의 탄생'이 그 예가 될 것이다.

'마카담스토리'도 마찬가지이다.

형식이나 인물관계도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영화이다.

 

수많은 텍스트가 떠오르지만 '마카담스토리'만의 개성이 있다.

'마카담스토리'의 리듬은 충분히 흥미롭다.

굳이 장르를 생각해보자면 블랙코미디이다.

 

이자벨위페르는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의 줄리엣비노쉬와 비슷한 역할로 나온다.

후반부에 오디션영상을 찍으면서 자신의 배역에 몰입해서 대사를 독백하는 부분이 나온다.

우연히 만난 소년을 통해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드러나는 장면인데 굉장히 뭉클하다.

 

상대역으로 나온 소년인 쥴벤쉬트리는 감독의 친아들이다.

일단 최근 본 배우 중에 제일 잘생겼다.

구스반산트 영화 속 소년들처럼 불안함을 머금고 있는 얼굴을 가지고 있다. 

위태로운 분위기에서 오는 매력이 큰 배우이다.

 

휠체어 에피소드는 앨리스먼로의 단편소설을 보는 것 같았다.

지극히 단편적인 에피소드인 동시에 매혹적이다.

누군가 내게 어떤 이야기를 만들고 싶냐고 물으면 그 대답으로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잘 만든 블랙코미디이다.

 

남자는 2층에 살고 있기에 엘리베이터를 평생 탈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내에서 싸이클을 돌리다가 다리를 다쳐서 휠체어를 타게 된다.

이런 식으로 일상의 균열이 생기는 방식부터가 블랙코미디이다.

편집 리듬도 좋아서 엄청 웃었다.

 

엘리베이터를 고치자는 주민들 의견에 반대해서 수리요금도 안 냈기에 새벽에 몰래 음식을 사러 나간다.

문이 닫은 식료품점들을 지나서 한 병원의 자판기에서 과자를 산다.

그리고 그 병원에서 한 여자를 만난다.

간호사인 여자 앞에서 당황하다가 자신이 사진작가라고 말한다.

 

그들은 자주 만나게 되고 남자는 여자를 촬영하고 싶다고 말한다.

여자는 유명인을 찍는 남자가 자신을 쉽게 보고 희롱한다고 생각한다.

그러자 남자는 말한다.

유명인은 많이 찍었지만 당신은 처음 찍어본다고.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 남자는 우여곡절 끝에 여자와 마주한다.

여자는 예쁘게 사진을 찍으려고 겨울임에도 반팔원피스를 입고 나왔다.

여자의 살결이 떨리는 것이 보인다.

남자가 웃으라고 해서 어색하다며 웃음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런 여자를 남자는 필름도 없는 카메라로 찍는다.

 

두 사람이 사진을 찍고 찍히는 짧은 장면은 거의 배드씬에 가까울 만큼 섹시하게 느껴진다.

물론 아주 깊은 사랑을 머금고 하는 섹스처럼 아주 달콤하고 섹시하게.

 

올해에 '러브레터, '러브액츄얼리', '이터널선샤인'이 재개봉하는 등 사랑에 대한 수많은 장면들을 봤다.

올해 목격한 사랑의 장면 중 가장 좋았던 장면을 묻는다면 '마카담스토리' 속 휠체어남자의 에피소드를 말할 것 같다.

 

가장 웃긴 에피소드는 마이클피트가 나오는 에피소드이다.

거의 '마션'이나 '인터스텔라' 급으로 보이던 그의 에피소드는 갑자기 완전한 블랙코미디가 된다.

대사가 가장 웃긴 에피소드이기도 하다.

불시착한 곳은 프랑스의 어느 한 주택이다.

프랑스에 사는 알제리인과 말이 통하지 않지만 그들은 어느새 소통함을 느낀다.

 

혼자보단 둘이 낫다.

이 말은 확실한 명제는 아니다.

회의감을 느끼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하다.

 

내 삶의 균열을 만드는 것도, 그 균열을 채우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며칠 전부터 자꾸 정체모를 소음이 들려서 불안할 때가 많았다.

소음의 정체를 밝히는 것보다, 불안하다는 감정에 대해 토로할 대상이 필요한거였다.

내가 느끼는 감정이나 물음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워진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