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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괴물의 아이 (バケモノの子, The Boy and The Beast, 2015)

 

 

 

신촌 아트레온이 cgv의 이름을 달고 있으니 어색하다.

이전에 '마더'나 '다크나이트'를 아트레온에서 봤었다.

'괴물의 아이'까지 아트레온에서 본 영화들은 하나 같이 좋았다.

 

시험기간에 영화어플인 '왓챠'를 시작했다.

영화를 보면 나도 모르게 영화벌점을 계산하게 됐다.

게다가 블로그에 적을 내용을 생각하는 습관은 이전부터 있었고.

블로그나 왓챠나 내겐 참 편리하고 유용한 수단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에 몰입하기 더 힘들게 하는 것들이기도 하다.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일상의 내게는 무척이나 낯선 일이다.

극장 안에서라도 솔직해지고 싶다.

감정을 표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공간이 내겐 극장이다.

감정의 동요에 따라 웃고 울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기에 내게는 여러모로 큰 의미를 가진다.

 

영화는 과연 내겐 어떻게 기억될까.

절대적 완성도보다도, 어떤 시기에 어떤 정서를 품고 봤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2015년은 개인적으로 가장 힘든 한 해였다.

사람들한테 상처도 많이 받았고, 자존감도 바닥을 쳤다.

'성장통'이라는 말로 설명하기에는 절대적으로 아프기만 한 시간이 더 많았다.

 

이런 시기에 봤기 때문일까.

'괴물의 아이'는 2015년에 가장 많이 울면서 본 영화이고, 가장 좋았던 영화이다.

 

호소다마모루를 정말 좋아한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메시지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야겠다 싶을 만큼 좋았고, '늑대아이'는 좋은 짜임새를 가지고 있다.

오히려 완성도에서 '괴물의 아이'가 가장 떨어지는 작품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 나의 정서와 가장 맞아 떨어졌기에, 앞으로 호소다마모루의 최고작을 물으면 '괴물의 아이'라고 답할 것이다.

 

'늑대아이'는 잘 만든 영화라는 것은 알겠지만 사실 보면서 그리 큰 감흥을 느끼진 못했다.

영화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늑대와 여자의 로맨스, 아이들의 성장이 담긴 시퀀스는 마음을 격하게 흔들었다.

내 마음이 흔들린 그 지점을 확대해서 보여준, '늑대아이'의 프리퀄이라고 할 수 있는 영화가 '괴물의 아이'이다.

 

작위적이고 설명적인 부분도 많다.

특히 '모비딕'과 관련된 설정은 과하다.

후반부의 전투장면은 영화 전체의 템포에 벗어난, 감독 개인의 취향이 과하게 드러난 부분이다.

 

하지만, 이러한 단점들까지도 잊게 만드는 장점들로 가득한 영화이다.

알고도 당하게 하는 장면들과 정서가 있다.

 

성장과 관련된 은유에 있어서 호소다마모루는 절대적이다.

그의 애니메이션에는 항상 아이가 등장하지만, 결국 아이들을 보며 흔들리는 것은 어른관객들이다.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갔던, 아니 애써 모른척해야 한다고 믿었던 성장통과 상처를 꺼내서 극진하게 보듬어주는 감독이다.

그러니 우리는 호소다마모루의 영화 앞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다.

 

영화 중반부까지는 아버지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오이디푸스 모티브로 뻔하게 풀어내려는 것이냐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호소다마모루는 정형화된 아버지의 이미지 대신 '친구'라는 키워드를 내세운다.

아버지의 부재를 아버지로 채우지 않고, 친구로 채운다.

아버지와 친구가 동의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순간, 이 영화에 내 마음을 온전히 내어주게 됐다.

 

내게 아버지란 일종의 판타지이다.

현실의 아버지와는 워낙 딱딱한 사이이기에, 아버지와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아버지와 친구처럼 지내는 모습이 내게는 짐승과 사람이 공존하는 것만큼이나 거대한 판타지로 보였다.

 

중간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친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자신이 부재한 동안 힘들었을 것이라고 단정 짓는다.

아버지가 부재하면 불행할 것이라는 도식화는 짐승의 세계와도 연결된다.

아버지가 부재한 아이에게 세상은 짐승의 세계처럼 느껴지지 않았겠냐는 편견.

하지만 영화는 짐승의 세계를 폭력적인 도시의 이미지 대신 친구가 존재하는 친화적인 세계로 그려낸다.

 

'가족의 탄생'과 비슷한 테마를 가진 영화이다.

가족에 대한 관습적인 개념에서 벗어나서, 개인화된 사회에서 '피'보다 '애정'이 가족의 중요요소라는 것을 보여준다.

권위적으로 누가 누구의 아버지가 된다는 식이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관계 맺고 때로는 아버지가, 때로는 친구가 되어주는 관계에 대해 말한다.

어쩌면 이러한 이상적인 관계와 공동체는 인간의 세계가 아닌, 짐승의 세계에서나 가능한 판타지일지도 모른다.

 

영화에서 짐승과 사람을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생김새보다도 어둠의 가능성이다.

인간의 이성에 대해 어둠의 가능성으로 해석하고, 짐승세계에서 이상적인 공동체가 형성된다는 것은 호소다마모루의 세계관을 보여주는 부부이라고 생각한다.

 

같이 성장한다는 테마는 사실 무척이나 뻔하다.

좀 더 성장하고 싶은 욕망, 자신을 내던져서 지키고 싶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 모두 우리에겐 익숙한 이야기이다.

 

주인공은 좀 더 큰 성장을 갈구한다.

처음에는 육체의 단련을, 육체가 단련된 뒤에는 지식을 갈구한다.

짐승의 세계, 즉 자신을 따뜻하게 보던 세계에서 벗어났을 때 과연 그는 행복할까.

이 영화의 끝이 해피엔딩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현실에 진입한 주인공은, 짐승의 세계를, 육체의 세계를 그리워하지는 않을까.

 

불안한 주인공과 쿠마테츠를 보는 내내 나의 마음도 위태로웠다.

성장통이라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고 상처받았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여전히 위태로운 모습들이 아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