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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벌새 (House of Hummingbird, 2018)

친구가 통신사 포인트가 남는다고 영화 볼 생각이 있으면 보라고 했다.

이번달 말에는 볼까 했던 '벌새'를 예매했다.

좋다는 평이 많은데, 실망할까봐 최대한 기대를 안 했다.

비가 유난히도 많이 왔고, 장우산을 극장에 두고 갈까봐 걱정했다.

좌석 밑에 장우산을 둔 채, 영화에 대한 기대보다 우산 분실에 대한 걱정이 더 컸다.

 

마감 때문에 보는 영화는 대부분 예전영화라서 집에서 스트리밍서비스로 본다.

극장에 가는 일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영화를 좋아하지만 극장에 가는 일이 줄어든다는 건 아이러니 하다.

극장 가는 길에 본 심보선 시인의 에세이에는 벌새를 언급한 대목이 있었다.

좋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벌새'는 올해 본 한국영화 중 가장 마음에 크게 남을 작품이다.

김새벽이 나올 때는 '한여름의 판타지아'가 떠오르고, 설혜인이 나올 때는 '우리들'의 순간들이 떠올랐는데, 장면이 섞인 덕분에 오히려 감정이 더 차올랐다.

'벌새'를 통해 처음으로 본 박지후의 표정은 때로는 유년기를, 때로는 시대를 보여준다. 

정인기가 연기한 가부장적인 아버지는 며칠 전에 본 '트리 오브 라이프'와 겹쳐져서, 보는 내내 힘들었다.

 

성장 과정에서 수많은 상처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함을 주는 이들이 있기에 결국 꾸역꾸역 성장해나간다.

요즘에는 누군가를 미워하는데 시간을 많이 썼는데, 내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따뜻함을 받았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영화 '벌새'처럼 모든 게 미워지는 순간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순간은 늘 공존한다.

 

94년은 어릴 적이므로 잘 기억나지 않는다.

첫 회사에서 매일 야근하고 택시로 넘어가는 성수대교가 한 때 무너졌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성수대교를 넘으면서 설마 이 다리가 무너질 거라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마치 영원할 것처럼 단단한 인연이 끊어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기억나지 않는 94년이나 지금이나, 마음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냐고 묻는다면 답할 말이 없다.

'벌새'의 은희는 2019년에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