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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그 남자 흉폭하다 (Warning, This Man Is Wild, その男,凶暴につき, 1989)


 




내게 기타노 다케시는 항상 흉폭한 남자였다.
그가 코미디언인 것도 모른 채 그의 영화를 먼저 접했기 때문이다.
그가 코미디언일 것이라고는, 적어도 그의 영화를 보는 동안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폭력의 미학을 담은 작품과 따뜻한 작품을 번갈아가면서 발표하지만, 난 그의 따뜻한 작품 속에서도 밝은 면에 비례하게 길게 그려지는 어두운 그늘이 더 눈에 들어왔다.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 캐스팅 되었을 당시에, 연출자인 오시마 나기사에게 주연으로 출연하는 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와 함께 찾아가서 자신들에게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촬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감각의 제국'으로 국제적인 스타감독이었지만, 깐깐하고 괴팍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이다.
촬영 당시 그들에게 감독은 화를 내지 않았고, 대신 그들 상대배우에게 더 화를 냈고, 그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낀 기타노 다케시는 진지하게 연기에 매진하게 된다.

덕분에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기타노 다케시가 코미디언이 아닌 진짜 배우로 인정받는 계기의 영화가 된다.
당시 현장에서 기타노 다케시는 감독을 보며 감독이란 참 이상한 존재라며 자신이 감독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말을 한다.
하지만 그의 데뷔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던 그에게, 주연으로 캐스팅된 영화의 감독인 후카사쿠 긴지 감독이 하차하게 되면서 자신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그 영화가 바로 '그 남자 흉폭하다'이고, 그의 연출가적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하필이면 연출 데뷔작의 원래 감독 자리가 후카사쿠 긴지라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틀로얄 시리즈로 유명한 후카사쿠 긴지는 폭력의 미학을 잘 표현하는 것으로 유명하는 감독이고,
기타노 다케시가 국제적으로 조명받는 계기도 그의 영화가 폭력의 미학을 잘 그려내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딱 맞는 영화로 데뷔를 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데뷔작이 혹평받는 경우에는 대부분 자의식 과잉인 경우가 많다.
기타노 다케시의 데뷔작인 호평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에너지는 충만한데, 표현에 있어서는 절제를 했기 때문이다.
현란한 액션 시퀀스 대신 무표정하게 폭력을 관찰하는 그의 시선은 기타노 다케시의 무표정을 연상시킨다.
그의 무표정은 어떤 장면 안에 섞여있어도 불안함을 보여준다.

각본을 쓴 노자와 히사시는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로 각색된 소설 '연애시대'의 원작자이기도 한데, 44살의 나이로 자살했다.
그를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의 글을 더 많이 볼 수 없다는 것이 참 아쉽다.

영화는 화려한 장면도 없고, 우울한 에너지로 가득하다.
엔딩까지 타협없이 세상의 폭력을 무표정하게 바라본다.
보는 내내 주인공의 여동색 캐릭터가 너무 관습적인 설정이라고 느꼈는데, 결국에는 영화 엔딩에서의 한 방을 통해서 영화의 우울한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작용을 하게 된다.

어릴 적 너무 가난해서 인형 살 돈이 없어서 인형가게 앞에서 울면서 집에 돌아왔다는 그의 일화를 떠올릴 때마다 그의 어린 시절에도 그가 지었을 무표정이 떠오른다.
불안한 그의 무표정을 좋아하기 때문일까.
가끔씩 그가 지어보이는 미소가 참 좋다.

그는 희극과 비극, 부드러움과 폭력, 선과 악을 오가는 추가 각각 한쪽으로 크게 당겨질수록 다른 한쪽이 더욱 크게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배우나 코미디언으로는 비트 다케시라는 예명을 쓰다가 감독으로는 꼭 기타노 다케시라는 본명을 쓴다는 것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배우나 코미디언으로 타인의 삶을 보여주고, 타인에게 웃음을 주는 작업을 떠나서, 연출할 동안은 온전히 자신의 세계를 그려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의 최근작들이 자의식 과잉인 경우가 많지만, 난 그래도 그의 영화가 품고 있는 에너지들이 좋아서 항상 그를 응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