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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내가 사는 피부 (La Piel Que Habito, The Skin I Live In, 2011)




자신의 딸을 성폭행한 남자를 성전환시켜두고 가둬둔다는 설정을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어떻게 이끌어갈지가 궁금했기에 원작소설인 티에리 종케의 '독거미'보다도 먼저 영화를 보고 말았다.

일단 감상부터 말하자면 페드로 알모도바르에 대한 기대가 큰만큼 많이 아쉬웠다.
사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연기마으로도 볼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엘레나 아나야의 연기까지 좋았다.

히치콕을 흡수해서 자신의 탐미적 시선과 섞은 알모도바르 특유의 스릴러 느낌의 시퀀스들이 특히나 좋았고,
음악이나 프로덕션 디자인도 여전히 화려하다.
욕망, 붉은색, 여성성 등 알모도바르를 상징하는 키워드들만으로도 그의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내 기준에서 여성을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게 그려내는 사람은 알모도바르 감독이다.
여성을 예쁘게 그려낸다는 뜻이 아니라, 여성이 얼마나 멋진 존재인지를 잘 그려내는 감독이라는 뜻이다.
그의 영화를 보면 항상 여성에 대한 동경이 보이고, 그 동경이 여성 캐릭터를 멋지게 그려내는 원동력이 된다고 생각한다.

알모도바르의 서사는 개연성보다도 우연들이 만들어내는 사건들이 흘러가는 것을 보는 재미가 큰데,
'내가 사는 피부'는 이야기 자체가 전사를 설명하는데 팔할을 사용하고 있다.
정작 전사가 끝나고 진짜 갈등이 시작되어야 할 부분에서 영화가 끝나버려서 아쉬움이 남는다.
딸을 성폭행한 남자를 성전환시키는 남자주인공을 중점으로 이야기가 펼쳐지지만, 남자주인공의 정서는 거의 묘사가 안 되어있기에 이야기가 굉장히 건조하게 흘러가는 느낌이다.
안토니오 반데라스의 무시무시한 무표정만으로도 정서를 전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차라리 성전환을 당한 베라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펼쳤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느날 잡혀서 성전환을 당한 베라의 심정이야 말로 사실 관객들이 가장 궁금해할 부분 아닐까.

영화가 끝나고나서도 내내 베라의 앞으로의 이야기와 심정을 떠올리게 되었다.
너무 세련되게 느껴져서 오히려 건조한 이 영화보다 욕망과 불안함으로 아슬아슬한 그의 영화를 보고 싶다.
감정적으로 무표정한 '내가 사는 피부'보다 욕망 앞에서 솔직한 표정을 짓는 그의 영화가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