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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하얀리본 (The White Ribbon, 2009)



영화 '밀양'을 보았을 때와 너무나 비슷하다.
난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박하사탕','오아시스'를 모두 좋아하기 때문에 '밀양'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컸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히든'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이기에, 그의 차기작인이 우리나라에서 상영된다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기뻤다.
칸영화제는 '밀양'의 전도연에게 여우주연상을 주었고, '하얀리본'에게 작품상을 주었다.

난 내 측근들에게 '밀양'을 함께 보자고 했고, 이번에도 내 측근에게 '하얀리본'을 보자고 했다.
'하얀리본'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극장 안의 풍경은 '밀양'을 보았을 때 극장 안의 풍경의 데자뷰였다.
'이건 평론가용 영화잖아.', '이거 예술영화네,'. '뭐야, 끝났어?' .'그래서 뭐 어쩌라는거야 이거.'
영화 속에 담긴 인간과 사회를 비판한 롱테이크보다 더 무시무시한 탄식과 불안이 극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극장에서 본 '밀양'과 '하얀리본' 두 편 모두 내 옆에 앉아있던 이가 영화가 끝나자 평론가들이 극찬한 영화 속의 심오한 메시지보다도 더 큰 메시지를 함축한 큰 한숨을 내쉬었다.

영화가 끝나고 난 느꼈다.
아... 이 영화를 누군가에게 추천해서 같이 보자고 하는 것이 아니었어!
영화에 대한 감상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보다 미안함이 더 큰 영화였다.
나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조조로 6500원에 보았지만, 혹시라도 8000원에 이 영화를 보고, 당신이 누군가에게 이 영화를 추천해서 함께 보게되었다면 영화가 끝나고 찜찜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게 될 확률이 높다.




내가 처음으로 가본 대학로의 하이퍼텍나다는 참 좋은 극장이다.
멀티플렉스 극장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예술영화들을 주로 수입해서 상영해주는 정말 영화계의 보배와도 같은 극장이다.
미하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을 우리나라에서 스크린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다만 '하얀리본'은 '밀양'과 마찬가지로 어렵고, 불친절하고, 함축적이고, 정적이다.
영화는 흑백이고, '히든'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하네케 감독은 롱테이크를 주로 쓰고 있는데, 영화 속 들판과 하얀색 자막이 겹쳐서 아예 자막을 읽을 수 없는 경우가 굉장히 빈번했다.
...물론 그 자막 몇 글자 보인다고 이 영화가 친절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다.

난 '히든'을 내 개인적인 베스트라고 할만큼 좋아한다.
'하얀리본'도 여러모로 '히든'과 비슷한 영화이다.
하나케처럼 영화 용어를 잘 이해하는 감독도 드물 것이다.
그는 영화의 어느 부분에 힘을 실어서 연출하기보다는, 온전히 영화 자체를 통해서 사회를 비판한다.
크리스찬 버거의 촬영, 특히 영화 속 롱테이크는 그 어떤 많은 말보다도 가치있는 비판방식이다.
영화의 전체적인 톤도 이 당시 시대를 잘 담아내어서, 하네케가 촬영할 때 참고한 아우그스트 잔더의 사진들 이상으로 시대상을 잘 그려내고 있다.

이 영화를 분석해서 꼼꼼하게 본다면 물론 그 가치를 발견해낼 수 있겠지만, 지극히 정적이고 불친절한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관객이 몇이나 될까?

하네케는 영화 속 사건들의 범인을 맥거핀처럼 사용하고, '누구'보다 '왜'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만들었지만,
범인을 찾는 스릴러에 익숙한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모호하고 지루하고 불친절한 스릴러로 느껴질 것이다.



내가 이 영화를 볼 때 극장 안에 10명만 와도 많이 온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대규모의 여고생들이 단체관람을 왔다.
선생님으로 보이는 분이 영화 시작 전에 인솔을 하시는 것을 보니 선생님께서 좋은 영화라고 생각해서 학생들과 온 것 같다.
그리고 난 영화를 보는 내내 걱정이 되었다.
쉴틈없이 분석하면서 보아도 한 번 보고 이해하기 힘들 이 영화, 메시지가 잘 와닿지 않을 이 영화를 보고 있을 여고생들이 고개를 갸우뚱하고 잠에서 깨기 위해 몸부림 치는 모습이 눈 앞에 선했다.

차라리 '슈렉 포에버'를 단체관람 가는 것이 이 여고생들에게는 더 큰 가치가 있지 않을까?
물론 그 여고생들이 모두 뛰어난 지적 수준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지만,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해도 '하얀리본'을 한 번에 이해하는 것은 힘들 것이다.
꼭 고등학생들에게 대학교 전공서적을 읽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저 여고생들에게는 빠른 편집과 화려한 컬러가 익숙할 것인데, 흑백영화에다가 롱테이크가 빈번한 이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힘들지 않았을까.
어쩌면 지금 내가 이 여고생들을 핑계로 내 불만을 토로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나서 가장 슬펐던 사실은 이 여고생들은 인솔한 선생님께서 '여러분 이 영화 감상문 제출하도록 하세요!'라고 로비에서 말했다는 것이다.
'하얀리본' 속 심오한 메시지 앞에서 아주 짧은 탄식조차 뱉을 수 없던 내가 그 선생님의 말에 나도 모르게 깊은 탄식을 뱉었다.
단체관람 온 여고생들이 어떤 학생들인지 알 수 없지만 일반적인 고등학생에게, 아니 대부분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한 번 보고 이해하고 설명한다는 것 자체가 무척이나 힘든 영화인 것은 확실하다.

하이퍼텍 나다에서 7월 10일 11시 조조로 이 영화를 본 여고생들은 지금 열심히 '하얀리본'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거의 유일한 '하얀리본' 리뷰인,이동진 영화평론가가 쓴 이 영화의 리뷰를 30명 정도 되는 여고생들이 사이좋게 말 바꿔가면서 잘 써서 감상문으로 제출하길 바란다.
검색하다가 우연히 이 글을 보게 된 학생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하고 싶다.
집에 가서 무한도전이라도 보면서 편히 쉬었기를 바란다.
과제를 하고 있을 여고생들이여 화이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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