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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폭스파이어 (Foxfire: Confessions of a Girl Gang, Foxfire, 2012)

 

 

 

한 해를 마무리하는 지금, 특별한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과 '폭스파이어'.

 

곰플레이어 홈페이지에서 무료상영해줘서 본 영화이다.

'무료'라는 글자에 충동적으로 눌러서 본 영화이다.

아마 그 두 글자가 아니었으면 평생 안 봤을 것이다.

 

이 영화 덕분에 내 삶에 아주 작은 변화가 생겼다.

이러한 작은 변화들만이 결국 나의 삶을 움직인다.

 

'폭스파이어'는 며칠 전에 본 다르덴 형제의 영화와 흡사하다.

로랑 캉테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비전문배우를 기용하고, 핸드헬드를 주로 사용한다.

비전문배우들로 이렇게 좋은 연기를 보여주려면 도대체 어떤 디렉팅을 해야하는 것일까.

 

사회의 아주 작은 사건이라도 그 사건안에 세상사가 다 들어잇다.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 일이고 사회의 일이니까.

 

이 영화 또한 마찬가지이다.

소녀들의 삶 속에 온갖 묵직한 화두가 다 들어있다.

과연 소녀들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 덕분에 140분의 러닝타임이 짧게 느껴진다.

 

낭만으로 가득한 소녀들이 사회에 저항한다.

소녀에서 어른이 된 순간, 소녀들의 낭만은 현실이 된다.

자본이 개입된 순간 낭만은 정말 빠른 속도로 냉각된다.

그들이 속한 집단도 그들이 저항했던 집단과 마찬가지로 차별과 계급이 존재한다.

가이드라인 없이 시작한 그들의 저항은 점점 혁명보다는 방종에 가까워진다.

 

'폭스파이어'라는 소녀의 집단을 만들어서 운영하는 리더 역할의 소녀를 보며, 한 사람만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허상인지가 드러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누구나 깨고 싶은 허상이다.

 

소녀들의 아슬아슬한 행보에 보는 이들이 더 긴장하게 된다.

스스로를 성숙하다고 믿지만 결국 그녀들은 여전히 낭만 속에 살고 있는, 몸만 어른인 소녀들이다.

불에 타는 듯한 열정으로 세상을 바꾸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녀들의 초기목표는 열정에 함몰되어서 재와 뼈만 남게 된다.

자신들이 왜 함께 있고 어디로 가는지조차 망각했지만 계속해서 열정만 남은 소녀들.

뜨거운 시절이었어, 라고 회상하기조차도 쓰라린 기억이 되어버린 그녀들의 현재를, 그녀들은 추억이라고 믿고 있다.

 

소녀들의 영화임에도 집단의 속성에 대해 말하는 영화이기에 보는 내내 군대시절이 떠올랐다.

군대에서 제일 많이 느낀 것은 나라는 사람이 잘 교육된 노예라는 사실이다.

노예가 되는 법을 알려주는, 수동적으로 행동하는 법을 알려주는, 시스템 밖은 지옥이라고 겁주는 사회의 시스템에 무척이나 잘 적응한 것이다.

 

오히려 시스템 밖에서 불안해하는 나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다.

강압과 억압이 익숙해서, 오히려 막연하게 동경했던 자유가 오면 감당 못해서 힘겨워했던 나를, 소녀들에게서 발견했다.

그 덕분에 소녀들을 보며 안타깝고 불편했다.

글을 쓸 때면 사회저항적인척 하고 쓰지만, 사실 난 사회의 시스템에 무척이나 순종적인 노예로 자라나버렸다.

이 말이 체념이 아니라 인정하고 반등하기 위한 선언이 되었으면 좋겠다.

 

몇 년 전에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터뷰에서 본 이후로 자주 되새김질하는 말이 있다.

'개인이 시스템 밖으로 나가는 방법은 세 가지이다. 죽는 것, 범죄자 되는 것, 그리고 미치는 것'

 

저항하는 자의 끝은 무엇일까.

체제가 전복된다던지 하는 그런 결과론적인 것이 아니라 저항의 과정 자체를 낭만이라고 생각하는 소녀들이 결국은, 부러웠다.

 

그녀들의 끝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난 이 영화를 아주 좋은 '과정'으로 기억할 것이다.

누군가 '폭스파이어'에 대해 묻는다면, 결론은 잘 기억 안 나지만 결론까지 가는 과정이 참 좋았던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