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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2014)

 

 

 

씨네큐브에 10분 늦게 도착했으나 보는데 무리는 없었다.

 

장만옥이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클린'이란 영화를 봤었다.

그녀의 전 남편이기도 한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영화이다.

장만옥의 연기 말고는 썩 큰 감흥을 못 느낀 영화였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도올리비에 아사야스의 작품이고, 보고 나서 느낀 감정은 '클린'과 비슷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좋았지만 영화 자체가 걸작이라고 느껴지진 않는다.

 

항상 느끼지만 별 생각없이 본 영화들 중에 걸작을 발견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으면 이명세 감독의 '형사'라고 말하는데, 교양수업 때 '형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보지도 않고 살았을 것이다.

오히려 작정하고 기대하고 본 영화들은 기대 이하인 경우가 많다.

 

그 덕분에 영화선택의 기준이 예전보다 덜 까다로워지긴 했다.

기대를 하지 않는다는 기준만 세워둘 뿐이다.

아무거나 보면 되지 않냐고 묻는다면, 내게는 영화가 노동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서 나쁜 영화를 보고 나면 회복기간이 너무 길다.

휘청휘청 거릴 정도이다.

 

그만큼 좋은 영화로부터 받는 긍정적 영향 또한 많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좋고 나쁘고의 기준은 영화의 완성도이지 메세지의 방향이 아니다.

잘 만든 지옥을 보는 것이 허술한 천국을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영화적 체험이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를 신선하게 느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너무나 많은 텍스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에 나열이 힘들 정도이다.

몇 해 전에 보았던 알랭 레네의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비롯해서 극 속의 극이라는 소스 자체가 워낙 흔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매력적이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자신이 받은 영향력에 대해서 쿨하게 인정한다.

잉마르 베리만이나 프랑스 고전영화들의 영향을 인정한 채 자기 스타일로 영화를 풀어낸다.

 

오히려 그 뚝심과 배짱이 이 영화의 최고매력이다.

매번 들었던 이야기도 말하는 이가 배짱을 가지고 말하면 집중하게 되지 않는가.

덕분에 이야기는 끝까지 차분하게 진행된다.

 

애초에 큰 무게감으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아주 사소한 욕망에 대한 영화이다.

영화 속 인물들이 품은 욕망이 충돌하는 순간에 이 영화의 매력이 드러난다.

영화 속 극과 실제가 겹쳐져 보이는 순간이 혼란스럽지 않은 이유는 극과 실제의 욕망을 굳이 구분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그 두가지가 선명하게 겹쳐져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운반하는 역할을 하는 배우들의 힘이 큰 영화이다.

줄리엣비노쉬는 '여름의 조각들'에 이어서 이번에도 올리비에아사야스와 함께 했는데, 내게는 여전히 레오 까락스의 영화 속 모습으로 각인된 줄리엣비노쉬가 욕망을 앞세운 역할로 나온다는게 흥미롭다.

 

가장 놀라운 배우는 역시나 크리스틴스튜어트이다.

나는 그녀가 나온 영화를 딱 한 편 봤는데, 다들 최악이라고 부르는 '브레이킹 던'이라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가장 후속판 영화이다.

그 영화를 보고나서 헐리웃에 가십을 뿌리는 이 여배우의 커리어는 금방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는 이전부터 헐리웃 독립영화에 꾸준히 출연하고 있었고, 그녀는 여러모로 이 영화와 잘 맞아떨어진다.

 

일단 클로이모레츠가 연기한 헐리웃여배우 역할은 딱 봐도 크리스틴스튜어트를 떠올린다.

헐리웃에서 가십으로 누구에게도 질 수 없는 여배우 중 한 명 아니겠는가.

그런 그녀가 헐리웃스캔들에 대해 침착하게 말할 때 묘하게 웃겼다.

정말 영리한 캐스팅이다.

 

그녀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트와일라잇 시리즈로 대중의 스타가 된 순간이 아니라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로 많은 관객들에게 연기로 인정받는 순간이 아닐까.

트와일라잇 시리즈 후보군 중 한 명이 제니퍼로렌스였다고 한다.

만약 제니퍼로렌스가 트와일라잇 시리즈에 출연하고, 크리스틴스튜어트가 독립영화 위주로 커리어를 쌓았다면 아카데미여우주연상과 헐리웃가십걸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이 영화가 지겹지 않았던 이유는 클로이모레츠 때문이다.

클로이모레츠를 정말 좋아하기에 ,개념없는 헐리웃가십걸로 나오는 그녀의 연기가 너무 귀엽고 웃겼다.

욕망에 대한 한없이 깊어보이는 이 영화에 그녀가 나오는 순간 분위기가 한없이 가벼워진다.

줄리엣비노쉬가 3D안경을 끼고 클로이모레츠의 초능력 연기를 보는 순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진귀한 광경이다.

 

세상 모든 사람은 배우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없다.

모두 하루에 일정 시간 이상은 연기를 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모두 배우로 살아가야할 운명이다.

 

자신이 연기하고 싶은 삶과 진짜 삶이 다를 때의 괴리감.

연기하고 싶은 여러 가지 삶 중 선택의 폭이 적을 때의 자괴감.

우린 모두 배우의 삶을 살고 있다.

결국 좋은 사람이 좋은 배우가 될 것이라고 믿으며 살아간다.

 

직업이 배우가 아닌 이가 좋은 배우로 인정받는 순간은 얼마나 슬픈 순간일까.

나는 좋은 배우가 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