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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Die Bad,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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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 장풍 대작전'은 내게 그냥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영화였다.
보는 내내 '류승완 감독의 액션이 이런거였나?'라는 의심과 함께.
왜냐하면 난 '아라한 장풍 대작전'으로 류승완 감독을 처음 알게 되었고, 그 당시 류승완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액션감독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류승완 감독을 탁월한 액션감독이라고 불렀고,
그러던 와중에 난 '주먹이 운다'를 보았다.
영화 속에 액션씬도 등장하지만, 이 영화는 지극히 감성적이다.
영화 속 액션씬이 시나리오의 분위기와 맞물리면서 서정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짝패'는 류승완이 추구하는 영화스타일이 잘 드러난 영화이다.
줄거리는 마치 고전클래식 영화가 그렇듯이 한 줄이면 요약가능이다.
줄거리보다는 액션시퀀스를 보는 재미가 쏠쏠한 영화였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류승완 감독을 충무로의 기대주로 만든 작품이다.
열악한 환경에서 만든 독립영화임에도 짜임새와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지극히 아날로그적인 영화의 분위기도 좋았고, 네 개의 단편은 통일성을 가지며, 액션도 너무 좋았다.
'주먹이 운다'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류승완 감독은 간단하고 평범한 줄거리를 자신만의 감성으로 연출하는 능력이 탁월한 것 같다.
지금의 류승완을 만든 영화가 이 작품이지만 한편으로 이 영화가 족쇄가 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외국힙합가수 중에 'Nas'라는 가수가 있다.
Nas의 데뷔앨범인 'Illmatic'은 힙합음악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명반이 되었다.
그의 1집은 힙합을 접하는 모든 이들에게 교과서가 되었다.
하지만 Nas는 인터뷰를 통해서도 자주 말했듯이 이 앨범은 그에게 족쇄이기도 하다.
항상 사람들은 그에게 Illmatic 앨범과 같은 완성도와 분위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Nas의 새앨범에서 그의 시적인 가사와 랩을 들으며 열광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에게서 갈증을 느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이 또 다른 Illmatic의 탄생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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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은 현재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차기작은 황정민과 류승범을 주연으로 하는 '부당거래'
그의 차기작은 어떤 분위기일까.

난 그에게서 또 다른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을 바라지 않는다.
그가 브라이언드팔마 감독처럼 한 장르 안에서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을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그가 어떤 부담감을 가지지도 않은 채 자기가 찍고 싶은 영화를 자유롭게 찍었으면 좋겠다.
(물론 영화계 현실이 그렇지 못하겠지만)
그가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를 찍었을 당시에는 신인이었기에 잃을 것도 없기에 자유롭게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었을 것이다.

물론 지금은 자기 자신이 책임져야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결국 그의 데뷔작이 주목받았던 것은 그가 부담감을 가지지 않은 채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류승완 감독이 어떤 마음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에서 항상 왠지 모를 부담감이 느껴졌다.
류승완의 각본은 간단하고 평범한 줄거리임에도 사람의 감정을 흔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그의 액션시퀀스는 여전하다.
그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난 그의 차기작이 그의 대표작이 되기를 바란다.

P.S 류승범은 이 영화가 데뷔작이라고 한다. 데뷔작인데도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고 연기도 잘한다. 예나 지금이나 류승범은 연기할 때 연기한다는 느낌이 안들어서 참 좋다. 류승완과 류승범. 우리나라 영화계에 이런 멋진 형제가 있어줘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