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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잘 알지도 못하면서 (Like You Know It All, 2008)



'딱 아는만큼만 안다고 하세요'와 '똑같은 사람인데' 라는 영화 속 대사가 이 영화의 메시지이다.
난 홍상수감독의 명성은 익히 들었지만 그의 영화는 '해변의 여인' 한 편밖에 보지 못했다.
'해변의 여인'은 내게 그냥 재미있는 영화일 뿐 영화 속에 묘사된 사람들의 모습은 그리 공감되지 않았다.

내가 '해변의 여인'을 볼 때보다 좀 더 속물이 되어서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위선에 힘들어해서였는지 몰라도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정말 재미있는 영화였다.
영화가 2009년도에 개봉했는데, 생각해보면 2009년에 가슴에 새겨둘만한 좋은 한국영화가 많았던 것 같다.
아무튼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굉장히 재미있고 통쾌한 영화이다.


영화는 제천과 제주도를 배경으로 한다.
영화의 주인공은 영화감독이고 제천과 제주도에서 영화 관련 일로 찾아와서 여러가지 일들을 겪게된다.
제천 에피소드에서는 엄지원,공형진,정유미가 등장하고, 제주도 에피소드에서는 고현정,유준상,하정우가 등장한다.

일단 영화 자체가 '해변의 여인'과 굉장히 흡사해보인다.
사람들의 위선을 말하는 방식이나 갑작스러운 카메라줌은 여전하다.
다만 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가 '해변의 여인'보다 훨씬 더 좋았다.
이 영화가 좀 더 잘 만들어졌기 때문인지 나 자신이 많이 바뀌어서인지는 '해변의 여인'을 다시 봐야지 알 것 같다.

'해변의 여인'을 보면서 고현정의 연기에 감탄하면서도 그녀의 천연덕스러움에 엄청 웃었었는데, 이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주인공인 김태우의 연기도 좋았지만, 고현정과 엄지원의 연기가 개인적으로 너무 좋았다.
엄지원은 캐릭터 자체도 굉장히 엉뚱하면서도 귀여웠고, 고현정은 남자들의 꼭대기에서 이야기한다는 느낌이 들만큼 성숙하고 당찬 캐릭터를 예쁘게 잘 소화해냈다.
정유미, 공형진, 유준상, 하정우 등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 좋았다.
영화를 보면 배우들이 연기한다는 생각이 안들고 실제생활을 촬영했다는 느낌이 들만큼 연기가 자연스러웠다.


홍상수 감독은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만 가지고 촬영을 시작한 뒤에, 매일 아침에 시나리오를 쓴 뒤에 배우들에게 나눠준다고 하는데, 그의 이런 작업 스타일이 이렇게 생동감있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
많은 배우들이 노개런티로 한 작품에 출연하게 할만큼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매력적이다.
하정우는 홍상수 감독에게 지나가는 행인 역할이라도 좋으니 출연하게 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홍상수 감독의 연출방식도 인상깊었다.
일단 갑작스러운 줌도 그렇고 촬영이 현란하고 세련되기보다는 투박한 느낌이 강했다.
몇몇 평론가들이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에서의 익스트림줌을 황홀하다고까지 표현하더라.
영화 속에서 제천과 제주도에서의 에피소드에서 주인공은 각각 커플을 만난다.
그 커플들과 자신의 관계를 나레이션을 통해서 설명하는 방식이 오히려 회상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보다 효과적으로 느껴졌다.

이 영화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제목을 정해놓고, '새 삶'을 키워드로 잡아서 새 삶을 살아가는 두 커플을 대칭축으로 한 뒤에, 제천과 제주도라는 공간을 촬영장소로 정하고 찍었다고 한다.
배우들은 영화 속에서 자신이 맡게될 역할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도 못한 채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홍상수 감독은 매일 찍어놓는 씬들을 머릿 속으로 정리한 뒤에 오늘 찍을 씬의 비중을 생각하며 촬영을 한다고 한다.
게다가 요즘에는 촬영하는 속도까지 엄청 빨라져서 작품을 내놓는 주기도 점점 짧아지고 있다.
물론 영화라는 예술이 오래 준비한다고 걸작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아침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이렇게 좋은 대사를 쓸 수 있고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그의 재능이 대단하다.
영화 속에 미리 무엇인가를 준비하는 상투성은 예술에서 죄악이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결국 이 말은 홍상수 감독 자신의 생각이 아닐까.


2009년도에 개봉한 작품 중에서 제일 좋게 본 '마더'의 봉준호 감독은 봉테일이라는 별명에 맞게 엄청나게 꼼꼼하게 준비를 하는 편이고,
마찬가지로 2009년에 개봉한 작품 중 좋게 본 작품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홍상수 감독은 촬영현장에서 매일 아침에 시나리오를 써서 프린트를 해서 배우들과 리딩을 한 뒤에 바로 촬영을 한다.
두 작품 모두 좋았지만 감독의 스타일이 완전 정반대이다.
역시 예술에 정석이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많이 안보았지만 그의 작업방식을 듣고 홍상수 감독에 대해서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난 어떤 일을 하던지간에 많은 준비가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었기에 홍상수 감독의 작업 방식을 들은 뒤에 그가 너무 과대평가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예술에서 시간과 결과가 꼭 비례한 것도 아니고, 홍상수 감독이 영화에서 쓰는 소재가 나와 개인적으로 안맞은 것도 선입견을 가지게 된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기는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떻게 시나리오를 사람들에게 가르치지라는 의문도 들면서. '해변의 여인'을 꽤나 재미있게 보았음에도 여전히 난 홍상수 감독이 과대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그동안 내가 홍상수 감독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선입견을 다 사라지게 할만큼 좋았다.

결국 내가 홍상수 감독을 평가하기 위해서는 그의 영화를 보는 수 밖에 없다.
한 관객으로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꼭 내가 그동안 홍상수 감독의 작품도 잘 안보면서 그가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 나에게 감독이 영화를 통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러냐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코믹한 터치로 위선적인 인물들을 묘사하는 홍상수 감독의 연출이 너무 좋았다.




누군가가 홍상수 감독에게 '당신의 영화에선 왜 존경할 만한, 본받을 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느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홍상수 감독은 이에 대해서 '나는 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예쁘다. 그들이 어쩔 수 없이 드러내는 인간적 결함들, 그것들조차 사랑스럽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우리도 사람이기에 도덕적으로 실수를 하지만 어느새 자기 자신의 실수는 잊은 채 타인의 부도덕한 행동을 비판한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위선적으로 행동하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이 있다.
어쩌면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냉철하게 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홍상수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바라보기에 그렇게 연출한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내가 '해변의 여인'을 보고나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한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부조리를 내가 저지른 부조리와 연결시켜서 영화가 마치 나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잘 알지도 못하면서'를 재미있게 본 것은 영화 속 인물들의 부조리를 그냥 단순한 유머로서 읽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위선적인 사람들을 비판한다는 느낌보다는 사람들의 부조리를 귀엽게 묘사했다는 느낌이 강한 영화였다.
홍상수 감독의 신작이 벌써부터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