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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인류멸망보고서



2006년에도 제작을 시작한 영화를 지금 보게 되다니.
그래도 지금이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SF가 굉장히 생소한데, 다소 위험할 수 있는 시도를 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멋진 신세계'는 음식물쓰레기 속에 있던 사과가 좀비바이러스를 일으키고 이야기이고,
'천상의 피조물'은 절에서 해탈했다고 주장하는 로봇을 고장처리할지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고,
'해피버스데이'는 꼬마가 주문한 당구공이 몇 년 뒤 지구멸망의 원인이 된다는 종말론이다.

'멋진 신세계'는 좀비물로 보이지만 정치풍자의 성격이 강해서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고기로 인해 감염되고, 구제역과 미국산 쇠고기의 이미지까지 더해져서 정치적 메시지가 노골적인 영화이다.
풍자를 좀 덜 노골적으로 하고 좀비물이라는 장르적 성격을 좀 더 강하게 띄고 있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선악과를 비롯한 몇몇 비유들과 이미지들도 좀 더 이야기 속에 녹여냈어야 한다고 본다.
어쨌거나 좀비물을 기대했기에 메시지에 좀비가 도구적으로 쓰인 것이 아쉽다.

좀비의 비중이 적다보니 류승범과 고준희가 조연 느낌이 들고, 오히려 이 에피소드의 주인공은 봉준호 감독 같다.
'괴물' 속 뚱게바라 임필성 감독의 연기만큼이나, 이 단편 속 봉준호의 연기는 영화 통틀어서도 최고!
분명 좀비물인데 기억에 남는 장면들은 토론하는 장면이라니.
괴물을 내세우고 정치적 이야기를 한다는 면에서 '괴물'이, 영화 전체의 톤은 '플란다스의 개'가 떠올랐기에 보는 내내 봉준호 감독이 생각났는데, 이래서 봉준호 감독과 임필성 감독이 친한 것일지도.

'천상의 피조물'은 2004년 ‘과학기술창작문예공모전’에 당선된 박성환 작가의 단편 <레디메이드 보살>이 원작이다.
인물이 추가된 부분도 있는데, 조윤희의 캐릭터는 활용도가 너무 낮아서 굳이 필요한가 싶었다.

소설 속 대사가 좋아서 대사를 많이 살렸겠지만, 너무 대사로만 극이 진행되다보니 지루하다.
영화가 좋아서 사색하게 되는게 아니라, 원작소설에서 가져온 소재의 매력 때문에 사색하게 된다.
소설에서 매력적인 부분들을 굳이 영화에서도 이런 식으로 표현해야 했을까.
프로덕션 디자인이 굉장히 좋다고 느꼈는데, 좀 더 좋은 이미지들을 많이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인간을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 해탈을 했다는 아이템은 정말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면에서는 종교적인 신과 로봇이 비슷한 면도 많다.
넘쳐나는 질문거리들을 대사가 아니라 이미지로 표현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영화 속 수많은 대사들보다 마지막에 김규리가 눈물 흘리는 장면이 훨씬 더 많은 울림을 준다.

예전에 시 수업을 들을 때 교수님께서 대상이 무엇이냐보다 대상을 대하는 자신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떠올랐다.
영화 속에서 로봇을 도구로 볼지, 보살로 볼지 사람들의 태도가 정하듯이 말이다.

세 에피소드 중 '해피버스데이'가 가장 좋았다.
'멋진 신세계'가 정리가 덜 되고 산만한 느낌이고, '천상의 피조물'이 너무 설명적인 반면, '해피버스데이'는 종말론이라는 단 하나의 테마와 발상을 가지고 뚝심있게 풀어낸다.
영화 통틀어서 가장 좋은 연기를 보여준 진지희의 연기까지 더해져서 임필성 감독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된다.
특히 종말을 앞에 두고 부모님에게 나는 어른이 당연히 되는 줄 알았어, 라고 말하는 부분은 영화 속에서 가장 잘 쓴 대사가 아닐까 싶을만큼 울컥하게 한다.

부분적으로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류승수가 아나운서로 나와서 지구멸망을 생중계하는 부분도 웃기다.
비슷한 영화 중에 박수영,박재영 감독의 단편 '핵분열가족'이 떠올랐다.
수많은 종말론에 대한 영화들이 있는데, 다른 영화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 스타일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보면서 자신이 주문한 당구공이 지구멸망의 원인이 되었는데, 그로 인한 죄책감에 대한 에피소드를 따로 만들어도 재밌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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