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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비포 선셋 (Before Sunset, 2004)


'비포선셋'을 '비포선라이즈'보다 더 좋아한다.
물론 '비포선라이즈'를 보지 않았다면 '비포선셋'을 결코 재밌게 볼 수 없다.
'비포선라이즈'를 먼저 보고 '비포선셋'을 본다면 또 다른 재미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두 편을 연속으로 몇 분 차이를 두고 본다는 것은 장단점이 있는 것 같다.
만약 1995년과 2004년이라는 물리적 시간을 두고서 두 영화를 보았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간직해두었다가 훗날 꺼내보곤 하는 첫사랑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비포선셋'의 후속편도 제작에 들어갔다는데 과연 어떤 영화일까.

영화 속 남녀는 비엔나에서의 짧은 사랑 뒤에 서로를 그리워한다.
작가가 된 남자는 출판을 기념하며 파리에 오게 되고, 그곳에서 남자와 여자는 몇 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카페에 들어가서 대화하던 중 그들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중에 뉴욕에서 같은 시기에 머문 적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계속해서 신경 쓰면서 살 수 없기에, 그들은 스쳐지나갔다.
둘의 추억은 간직해두어야 할 것으로 규정되어 지고, 추억을 추억으로 남긴 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짝을 만나게 된다.
사랑의 기운이 뉴욕을 돌고 있었지만, 그 기운의 출처가 비엔나에 머물러있을 추억이라고 여기고, 그들은 뉴욕에 함께 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조차 못한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경우가 많다.
서로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다고 여겼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과거에 같은 공간에 같은 시간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서로에 대해 의식없이 다른 누군가와 혹은 혼자서 만들었던 추억인데, 그 추억의 배경 어딘가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이가 있다.

남자는 말한다.
노트르담을 폭파시키라는 명령을 받은 부하가 있었는데, 그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명령을 따를 수 없었다고.
여자는 말한다.
어차피 언젠가는 사라질 것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워도.

비엔나에서의 기억, 이들의 추억은 부식은 커녕 점점 더 아름답게 가공되어 왔다.
박물관에 방치된 유물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차를 따라주어야 더 아름다워지는 고대의 찻잔처럼, 이들은 서로가 품고 있는 추억을 꺼내서 보듬고 또 보듬으며 살아온 것이다.

여전히 둘은 돌려말하고 있다.
대화에 성적인 농담을 섞고, 가운데 손가락을 올리며 장난을 쳐도, 이 둘이 하고 싶은 말은 명확하다.
두 사람이 처음 기차에 탄 날, 남자는 자기와 여행을 다니다보면 자신과 잘 될 수도 있고, 훗날 다른 남자를 만나도 기차 속 그 남자보다는 낫다라고 느낄 수 있으니 손해볼 것 없다며 함께 여행을 하자고 한다.
그리고 지금, 몇 년만에 마주한 여자는 자기 나름의 답을 내렸다.
아니, 이미 답을 알고 있었으나 사랑에 대한 편견으로 멀리 돌아서 온 것일지도.

남자가 비행기를 타야할 시간이 다가온다.
지금의 만남을 다시 추억에 묻어두고 일상에 돌아가기 전, 결국 둘은 서로에게 자신이 겪는 어려움과 그리움을 말한다.
다른 여자와 결혼식장을 가는 순간에도 네가 생각나는 것을 보며 내가 미쳤냐 싶었다고.
왜 남자들은 나에게 결혼하자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사랑을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만 하고 떠나가버리는지 모르겠다고.

여자는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가 좋은 이유에 대해 말한다.
마당에 두면, 매일 보는 마당풍경임에도 처음 보는 것처럼 낯설어하는 모습이 너무 좋다고.
남녀가 지금 현재 겪고 있는 사랑은 설렘없이 익숙해져버린 풍경이고, 비엔나에서 나누었던 짧은 만남은 매일 꺼내보는 추억임에도 매일 새롭고 빛이 난다.
아무리 꺼내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사랑의 기억 앞에서, 남녀는 서로를 익숙한 척 바라보려고 한다.
9년 내내 닦아내며 그리워하던 추억 앞에서, 이들은 결국 사랑의 표정과 몸짓을 꺼낼 수 밖에 없다.

해 뜨기 전(Before Sunrise) 사랑을 꿈꾸며 밤을 보내고, 해 지기 전(Before Sunset) 지독한 현실의 일상이 지속된다.
너무 꿈 같아서 이들은 사랑의 열병에 걸렸음에도 서로를 보내준 것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와서 서로를 바라보는 지금, 이들은 서로를 원해왔음을 느낀다.
밤이 아니어도, 꿈 같은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사람을 앞에 두고 이들은 쉽사리 서로의 마음을 말하지 못한다.

이 영화는 첫사랑과의 조우도, 과거의 연인과의 조우도 아니다.
사랑에 대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판타지와의 조우이다.
그래서, 영원히 아름답게 기억될 수 밖에 없는 영화이다.

영화는 결론을 내내 미루고 관객에게 마지막 장면을 던져준다.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만약 그 대답이 비슷한 남녀라면, 이 영화를 함께 봐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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