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

애정만세 (愛情萬歲, Vive L'Amour, 1994)

 

 

낮잠을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밤이 되면 잘 것인데 낮에 잠이 들면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영화를 본다.

보면 졸릴 것 같아서 망설였던 정적인 아트필름들 중에 한 편을 골라서 본다.

 

내가 본 영화의 절반 이상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봐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본 영화들이다.

그런 의무감으로 본 영화들이 내게 좋은 자양분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설날 오전에 가족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다가 낮잠을 잤고, 일어나자마자 미뤄둔 숙제처럼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봤다.

 

한 여자가 집을 팔기 위해 내놓는다.

우연한 계기로 그 집 열쇠를 손에 넣은 두 남자가 있다.

두 남자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각 밤이 되면 그곳에서 샤워를 하고 잠을 잔다.

두 남자는 어느날 그 집에서 마주하고, 친구가 된다.

 

영화 '빈집'이 떠오른다.

김기덕의 '빈집'도 대사가 거의 없지만, '애정만세'는 더하다.

있는 대사들조차 인물들의 속마음보다는 피상적인 말들이고, 음악은 아예 없다.

 

배우들을 보면 그들의 과거작이나 차기작이 궁금해진다.

이강생은 좀 다르다.

그를 보면 그의 삶이 궁금해진다.

배우가 아닌, 인간 이강생의 삶.

 

차이밍량과 이강생은 항상 함께다.

내게 대만은 이강생의 이미지가 크다.

홍콩이 양조위라면 대만은 이강생이다.

홍콩이 왕가위라면 대만은 차이밍량이다.

 

차이밍량과 이강생의 영화는 외롭다.

차이밍량이 그려내는 외로움은 좀 다르다.

감독이 의도하고 그려낸 외로움이 아니라, 차이밍량과 이강생이라는 개인이 철저히 외롭게 살았기에 나온듯한 진짜 외로움이 있다.

영화적으로 여러 장치를 만들어서 그려낸 외로움이 아니라, 진짜 피부로 와닿는 외로움이 차이밍량의 영화에는 존재한다.

 

내게 영화의 시작은 홍콩영화, 그 중에서도 왕가위였다.

가장 많이 본 영화가 '중경삼림'이고, 왕가위와 함께 20대 초반을 보냈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가 '중경삼림'과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것도 뒤늦게 알았다.

빠른 편집의 '중경삼림'과 롱테이크의 '애정만세'는 비슷한 시기에 존재한 전혀 다른 두 세계 같다.

 

진소영은 잘 생겼고, 양귀매는 '애정만세'에서 제일 빛나는 배우다.

이강생은 크게 움직이지도, 과감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다.

과일을 볼링공처럼 던지고, 덤블링을 하고, 여자드레스를 입는 장면에서 요염한 포즈를 짓는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혼자 존재하는 시간을 훔쳐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영화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은 관음일지도 모른다.

 

롱테이크를 관객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장면에 흠뻑젖어있어야만 한다.

영화 초반의 롱테이크는 관객이 이제 막 작품의 세계에 진입하는 호기심의 단계이기에 충분히 수용할 여지가 크다.

극 중후반에 등장하는 롱테이크는 결단이 필요하다.

이정도면 관객들이 이 세계에 충분히 젖어들지 않았을까라는 확신.

 

솔직히 말하자면 '애정만세'가 보여주는 외로움의 단면들에 대해서는 피부로 느꼈지만, 이 영화 속 롱테이크들은 내게 체험보다는 견디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강생이 잠든 진소영에게 입을 맞추고, 마지막에 양귀매가 우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보여줬지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누군가의 솔직한 모습을 오랜시간 응시하는 것보다, 스쳐지나간 누군가의 속마음을 추측하는 것이 내겐 더 익숙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목은 '애정만세'지만 이 영화에는 애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애정이란 무엇일까.

이들이 느끼는 외로움도 애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애정이 뭔지는 모르지만, 다들 애정을 갈구하기에 나도 애정 비스무리한 것을 갈망하는, 그런 사회에 살고 있는 걸까.

이렇게 외로운 대만의 풍경을 보고나서 이 모든 모습들을 묶어서 '애정만세'라고 불러야하는 아이러니가 우습다.

 

이젠 낮잠을 자고나면 차이밍량의 영화가 떠오르고, 외로울 것이다.

그렇게 낮잠은 외로운 것이 된다.

다음에 외로운 낮잠을 자게 되면, 일어나서 차이밍량의 '홀로 잠들고 싶지 않아'를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