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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싱글맨 (A Single Man , 2009)



원작소설을 보지 않았다면, 이 영화의 감독인 톰 포드가 구찌의 디자이너였다는 것을 몰랐다면 영화 '싱글맨'은 내게 조금은 실망스러웠을지도 모르겠다.
영화 '싱글맨'을 보고 싶다는 생각도 원작소설 때문에 하게 되었다.
지하철에서 읽는 책과 집에서 읽는 책을 따로 정해서 읽는 편인데, 소설 '싱글맨' 때문에 지하철 타는게 설렐만큼, 소설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여운 때문에 무슨 짓을 해도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이왕이면 소설 '싱글맨'의 좋은 여운을 가지고 영화를 보고 싶었다.

원작소설이 근래 읽은 책 중 가장 좋았고, 그 여운을 가지고 봤기에 영화도 꽤나 만족스러웠다.
영화에서 충분히 설명 안 된 부분도 짐작을 통해서 채워나가며 볼 수 있었다.
소설을 안 읽고 영화를 봤다면 너무 관념적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원작소설이 영화보다 더 좋았다.
소설을 안 보고 영화를 먼저 보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아직 영화와 소설을 모두 안 본 이들에게는 소설을 먼저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생략된 줄거리도 많고, 쿠바 미사일 사태 이후 안정을 찾은 1960년대의 미국이 배경이라고 하기에는 잠깐 나온 단역들의 의상과 헤어조차도 너무 화려하고 세련되어 보인다.
물론 내용과는 별개로 의상과 헤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 영화만 보면 60년대가 패션의 절정기인줄 알고 살 것만 같다.

의상과 헤어뿐만 아니라, 음악 또한 훌륭하다.
소설도 탐미적 시선으로 진행되는데, 톰 포드는 소설의 그 톤을 잘 살려서,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영화 속에 다 담았다.
거대한 런웨이쇼를 보는 느낌이다.
노년의 쓸쓸한 삶을 견뎌내고 있는 이가 런웨이 위를 걷는다는 것이 어떤 풍경일지 조금은 상상이 간다.

아주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무척이나 아름답다.
줄리안무어와 콜린퍼스가 함께 피던 보라색 담배, 줄리안무어의 집에 가기 전에 콜린퍼스가 보게 되는 주황색 장미, 니콜라스 홀트가 입은 앙고라니트까지.
화려함이 돋보이게 위해서 조금 평범한 것도 나와줘야하는데, 영화가 화려함으로 꽉 차서 시각적인 빈틈이 별로 없다는 느꼈다.

쓸쓸한 삶에 대해서 말하는 영화이지만, 고독조차도 굉장히 멋지게 포장되어있다.
물론 멋지게 포장된 겉모습 때문에, 그 겉모습 뒤에 있는 외롭고 쓸쓸한 감흥이 더 두드러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에는 톰포드가 보여주는 내적 갈등은 그가 만들어낸 겉모습들에 비해서 밀도가 떨어진다.

이미지가 감각적이다보니 상대적으로 대사나 독백이 어색했다.
대사가 많은 영화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대사를 더 줄이고 이미지 위주로 갔으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이 남았다.
대화들은 소설에서 거의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단편적으로 쓰기에는 감흥이 덜했고, 그에 비해서 장면장면의 이미지는 단편적으로 쓰여도 충분히 매혹적일만큼 하나하나 흠잡을 것이 없었다.

내게 영화 '싱글맨'은 색감으로 기억될 것이다.
영화는 세 가지 색감으로 진행된다.
흑백, 청색, 적색.
현재의 쓸쓸한 삶은 청색으로, 과거 회상은 흑백으로, 어떠한 계기로 생동감을 얻게 되는 순간에는 적색으로 영화가 진행된다.
다른 디테일의 차이를 주기보다, 조명과 색감을 통해서 인물들간의 관계와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 좋았다.
짧은 한 마디, 분위기의 작은 변화에 따라 변하는 색감으로 인해 관객들의 마음도 움직이게 된다.

원작소설을 본 이들이라면 자막없이 봐도 무방할만한 영화이다.
대화가 언어 이상으로 리듬과 표정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대화하는 부분을 보며 연기디렉팅이 참 잘 되어있다고 느꼈다.

콜린퍼스는 '싱글맨'을 통해서 베니스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았는데, 이 영화는 콜린퍼스의 원맨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가 얼마나 근사하고 내면연기에 능한지를 원없이 보여준다.
정적인 이 영화가 수많은 감정들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콜린퍼스 덕이다.
게다가 영화 내내 입고 있는 수트들이 하나같이 너무나 멋져서 그의 나이를 잊게 된다.

콜린퍼스의 과거연인으로 나오는 매튜굿은 영국신사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린다.
제2의 휴그랜트라고들 하는데, 휴그랜트보다 훨씬 클래식한 멋을 가진 배우이다.
짧게 나오는 회상장면들마다 너무 잘생긴 외모 덕분에 몰입하기가 힘들 정도였다.

소설을 읽을 당시에 상상했던 캐릭터와 가장 잘맞은 캐스팅은 줄리안무어이다.
동성애 영화를 찍는 감독들에게 항상 우선순위로 거론되는 여배우이기도 한데, 소설 속 이미지와도 참 잘 맞는다.
오히려 콜린퍼스의 상대역이라고 할 수 있는 니콜라스 홀트보다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준 덕에, 영화의 두 축이 콜린퍼스와 줄리안무어인 것처럼 느껴졌다.

니콜라스 홀트는 소설 속에서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오히려 스페인 남성으로 잠시 등장하는 코타자레나가 더 인상적이었다.
니콜라스 홀트와 콜린퍼스 사이에 흐르는 성적인 기류가 영화에서는 너무 많이 생략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둘이 나체로 수영을 하고 옷을 갈아입어도 소설 속에서 보여지던 그런 성적 에너지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가장 좋았던 장면은 은행 장면이다.
잠시 자신의 가방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는 콜린퍼스를 부감으로 잡고, 가방을 열면 소녀의 푸른색 구두가 다가온다.
마치 가방이 열리는 것이 비밀을 여는 것만 같고, 이어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소녀가 콜린퍼스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놓는 장면인데, 거의 마법에 가까운 장면이다.

원작이 워낙 좋았기에, 감독도 연출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살릴지 고민했을 것이다.
원작이 주는 유머들은 거의 대부분 사라졌고, 대신 그 자리를 감각적인 디테일로 채워넣은 영화이다.
이 선택이 유효했는지는 서사와 이미지 중 어떤 것을 중요시하는 관객이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다.

조지가 케니를 대하는 태도는 소설에서나 영화에서나 흥미롭다.
과거의 연인이었던 짐을 떠나보낸 뒤, 조지는 케니를 보며 흔들린다.
조지가 케니를 보며 흔들렸던 것은 자신의 옆자리를, 죽은 짐의 자리를 대신할 사람이 케니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짐이 과거에 자신을 바라보던 자리에 자신이 서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자신이 케니를 바라보며 서있는 자리가 바로 과거에 짐이 자신을 바라보던 자리였기에 짐의 마음을 생각하며 많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과 배려가 필요했을지를, 그 사람이 부재하기 전에는 알기 힘들다.

세상은 아무리 힘들고 미칠 것 같아도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있기에, 인내할 수 있기에 슬픈 것이다.
잊는 것이 고통스러워하는 것보다 더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매순간 몸으로 배워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