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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우리도 사랑일까 (Take This Waltz , 2011)



2012년은 적어도 내겐 사랑의 해이다.
이렇게 좋은 사랑영화가 많았던 해가 없었던 것 같다.
지금 내게 사랑영화 열 편을 뽑으라고 하면 그 중 절반쯤은 2012년에 본 영화 중에 속해있을 것이다.
올해에 봤던 인상적인 사랑의 풍경 중 하나가 '우리도 사랑일까'이다.

내용은 간단하다.
유부녀가 이웃의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결코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영화, 사랑영화이다.
사랑영화에 개연성이라는 말이 유효할까.
잘 짜여진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무튼 이 영화는 좋은 감정의 결을 가진 영화이다.
보다보면 어느새 영화의 결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된다.
주인공을 따라 덩달아 설레고, 고민하고, 슬퍼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도 사랑일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다.
사랑영화의 관건은 결국 공감일텐데 반응이 호의적이라는 것은 결국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는 뜻이다.
공감에 따라 만족도가 다르겠지만 특히 여성관객들이 더 많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여성의 심리를 너무 섬세하게 잘 표현한 영화이다.

사랑에 빠졌을 때 여자는 어떤 표정을 짓냐고 묻는다면 이 영화 속 미셸 윌리엄스의 표정을 보라고 말하고 싶다.
사랑은 내 곁을 지나간 수많은 이들의 표정으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누구나 사랑의 표정을 지을 수 있지만, 평생동안 대부분의 이들은 사랑의 카테고리에 속한 아주 일부분의 표정만 지은 채 살아간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배운 표정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얼굴에 있었는 지도 모르고 살아왔을 표정들.
미셸 윌리엄스는 사랑의 역사에서 생길 수 있는 다양한 표정들을 차근차근, 때로는 급격하게 보여준다.

미셸 윌리엄스가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세스로건은 후반부에 영화를 거의 삼켜버린다.
그의 저음목소리를 좋아하지만 주로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나와서 이렇게 자상한 남자가 어울릴지는 상상도 못했다.
후반부에 세스로건의 다양한 표정들이 이어지는 장면이 있는데, 이 부분에서 세스로건의 표정을 보면서 사랑하면서 비참했던 모든 순간들을 다 떠올렸던 것 같다.
세스로건 캐릭터가 너무 많이 공감되어서, 장면들 사이에 있는 여백들을 과거와 현재의 나로 채워나가느라 더 슬펐던 것 같다.
루크 커버가 연기한 캐릭터도 근사하지만, 세스로건에게 마음이 많이 갈 수밖에 없었다.

영화의 후반부는 정말 압권이다.
미셸 윌리엄스의 꿈 속에서 등대가 나오고, 세스로건의 표정들, 과감한 편집을 통해 보여주는 사랑의 광경들, 뒷부분에 이어지는 사라실버맨의 목직한 대사까지.
영화의 요약을 넘어서 사랑의 과정에 대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요즘 들어서 너무 거대한 사랑이 찾아올 때면 겁먹고 그 사랑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만 거대하지, 금세 그 안이 텅텅 비어있거나, 너무 작게 느껴지게 될 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굳이 겁먹지 않아도 어느새 식어버릴 것이다.
사랑의 시작이나 끝, 혹은 갑자기 끼어든 사랑과 같은 찰나의 순간들 때문에 우린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곤 한다.
 
영화 속에서 여자가 이웃남자에게 사랑을 느끼고나면 집에 와서 남편에게 평소보다 더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한다.
가장 잔인하게 느껴진 장면이다.
여자는 이웃의 남자에게는 표현도 잘 안 하지만 마음을 주고 있고, 남편에게는 적극적으로 애정표현을 하지만 열어둘 수 있는 마음의 한계선을 정해두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때 우리는 무엇을 사랑이라고 부를 것인가.
둘 다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결국 마음과 포즈 모두 한 곳으로 가야만 하는 운명이다.

표현을 못해서 아무도 모르겠지만 내 마음이 향해있는 그를 사랑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내 마음은 식었을지언정 사랑의 포즈를 취하게 하는 그를 사랑이라고 부를 것인가.
이런 과정에서 이 세 사람 모두 너무나 다른 뉘앙스로 서로에게 혹은 자신에게 묻게 된다.
우리도 사랑일까?

여자가 이웃남자와 놀이기구를 탈 때 노래가 흘러나온다.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라디오는 여전히 쓸만하고 사랑받고 있지만, 사람들은 새로 나오고 더 좋아보이는 비디오라는 매체를 찾아간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사랑은 설렘도 없고 익숙하지만 행복하고 평안한 사랑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사랑의 설렘이 찾아오자, 한없이 인자하던 그 사랑에 빈틈이 보이고, 빈틈의 크기는 항상 똑같지만 날이 갈수록 크게 느껴진다.

주변사람들은 그 빈틈을 모르기에 여자에게 묻는다, 그 남자와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냥 우리 둘 사이에 빈틈이 생겨서요.
그 빈틈은 언제나 있었기에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견딜만했기에 사랑하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빈틈을 만든 것은 새로운 사랑을 찾아나서는 그 마음이다.
새로운 사랑이 나타나자 그 빈틈 속에 손가락을 하나 넣고, 두 개 넣고, 계속해서 벌려보아도 원위치 되는 그 빈틈 앞에서 고즈넉하게 말하게 된다.
우리 사이에 빈틈이 생긴 것 같아.
아무도 보지 못하는, 어쩌면 너와 내게도 잘 보이지 않을 지도 모르는, 존재한다고 믿고 싶은 빈틈.

놀이기구도, 노래도 끝이 난다.
허탈함과 공허함만 남고 놀이는 끝났다.
설렘은 인생전체에서 놀이기구를 타는 시간만큼이나 짧다.
놀이기구를 다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가 돌아갈 집이 되어준 그 사랑을 버리고 놀이기구 같은 사랑을 향해 가기도 한다.
얼마 안 가 새로운 사랑은 익숙한 사랑이 되고, 두 사람은 놀이기구를 집이라고 부르게 되고, 더 재미있는 놀이기구가 등장하게 된다.

두려워지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 것도 못하는 이들을 위한 잠언과 같은 영화이다.
결국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똑같은 구조이고, 아주 약간의 내용만 바뀐 채 반복된다면, 우린 설렘을 찾아 영원히 사랑의 첫 순간만을 쫓아다녀야할까.
사랑의 지속성을 과연 무엇이라고 정의내려야하는 것일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
여자는 쿠키를 굽고 있다.
두 남자 중 누군가를 위해서 굽는 쿠키일까.
누군가를 위해서 굽는다는 것이 중요할까, 아니면 쿠키를 굽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일까.
사랑의 주체는 나일까, 상대방일까, 아니면 사랑 그 자체일까.

'take this waltz'라는 레너드코헨의 곡에서 이 영화는 시작되었다.
왈츠 멜로디로 만들어진 노래인데, 이 멜로디에 맞춰서 춤을 추면 울면서 춤을 마무리하게 될 것 같다.

확인하지 않고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어나간 사랑이 엇나간다면 그것은 그 어떤 언어로도 표현 못할만큼 슬플 것이다.
우리도 사랑일까, 라는 잔인할 수도 있는 확인의 말이 필요한 순간이 결국은 오게 되지 않을까.
사랑의 시작에도 쓰이고, 끝에도 쓰일 수 있는 언어이기에 더 아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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