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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레스트리스 (Restless , 2011)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의 장례식을 돌아다닌다.
어느날 장례식장에서 만난 한 소녀가 소년에게 아는 척을 한다.
둘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소녀의 삶을 얼마 남지 않았다.

연말이면 혼자서 개인적인 베스트영화를 선정한다.
가끔 내 베스트영화 목록을 싹 다 갈아엎을 만큼 울림이 큰 영화를 만날 때가 있다.
'레스트리스'가 내겐 그렇다.

난 평론가가 아니기에 내게 베스트란 논리는 조금 헐겁더라도 감정을 흔드는 영화이다.
그런 면에서 구스반산트의 작품 중 '엘리펀트'보다 '레스트리스'가 더 좋다.
사랑에 대해 다룬 영화에 시큰둥한 편인데, '레스트리스'를 보면서는 참 많이 운 것 같다.

영화 마지막 소년의 표정, 그리고 엔딩크레딧.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동안 흐르는 일련의 음악,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눈 앞에 펼쳐지는 행복했던 시간들.
영화가 끝나고 느낀 감정의 출처는 아마 영화 속 소년과 소녀의 행복했던 시절일 것이다.

영화를 어디에서 누구와 어떤 시기에 보냐고 중요하기에 나중에 다양한 조합으로 이 영화를 몇 번 더 봐야겠다.
내가 이 당시 왜 이 영화에 그렇게 많이 흔들렸냐를 알기 위해서라도.

구스반산트는 청춘에 대해 자주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소재는 청춘이 아닐까.
불안한 청춘의 삶, 그 사이사이에는 이것저것 끼어들 틈이 많기에.

구스반산트가 이번에 청춘이란 단어 사이에 끼워둔 단어는 '죽음'이다.
물론 더 주목해야할 것은 항상 어두운 키워드로 일관하던 구스반산트의 영화에 노골적으로 사랑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구스반산트가 사랑에 대해서 말한다.
아무리 어두운 청춘을 말해도 아름답게 그려내는 구스반산트가 말이다.
구스반산트는 너무 어둡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경이로운 장면들이 많다.
특히 사고현장처럼 분필로 서로가 누울 곳을 그리고 시체놀이를 하는 장면.
둘이 시체처럼 누워서 대화를 하는 장면은 고이고이 간직해뒀다가 꺼내봐야겠다고 느낀 장면이다.

장례식장에서 사랑을 시작한 소년과 소녀.
장례식장은 엄연히 말하자면 죽음의 기운보다는 죽음에서 파생된 슬픔의 기운이 큰 공간이다.
죽음이란 한 장 뿐인 카드를 이미 쓰고 떠나버린 이를 위해서 슬퍼하는 공간이기에.
소년과 소녀의 사랑, 그 시작은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 끝은 슬픔이 아닐 것이다.

우릴 성숙하게 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다.
우릴 성숙하게 하는 것은 죽음 뒤에 우리 곁에서 남아서 우리를 위로해주는 이들과 내게 남은 추억들이다.
결국 사랑이 우리를 성숙하게 만든다.
사랑했던 시절들, 내게 남은 사랑들, 앞으로 이어질 사랑들.

죽음 때문에 더 사랑했던 것일까라는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죽음은 쉽게 잊혀진다.
사랑은 계속 될 것이기에 죽음은 잊혀질 수 있고 우리는 잘 견디며 살아갈 수 있다.
가장 슬픈 것은 혼자서도 잘 견뎌낼 수 있을만큼 성숙해지고 또 사랑하고 또 죽음을 보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슬플 걸 알아도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알면서도 시작해버린 것들이 이미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