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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세상의 모든 계절 (Another Year, 2010)



씨네코드선재는 내게 여러모로 좋은 기억을 많이 남겨준 극장이다.
내게 씨네큐브나 스폰지하우스가 있는 광화문이 혼자서 매주 습관처럼 가는 곳이라면,
씨네코드선재는 항상 내가 좋아하는 이들과 함께 했던 곳이다.
'낮술'을 볼 때도 그랬고, '대부'를 볼 때도 그랬다.
덕분에 혼자 걷는 삼청동 길이 제법 어색했다.

이화여대 안에 아트하우스 모모가 있어서 부러워하듯이, 덕성여고와 풍문여고 학생들도 참 부러웠다.
씨네코드선재처럼 좋은 극장도 있고, 예쁜 삼청동 거리를 걸어서 등교하고, 정독도서관이 옆에 있고, 많은 미술관들이 학교 주변에 있으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모두 여고, 여대이다.
씨네코드선재에서 상영해주는 예술,독립 영화들을 보며 자란 아이들은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조금은 다른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고등학교 시절 문학반끼리 교류한답시고 갔던 풍문여고는 처음 가본 여고의 이미지보다도 삼청동에 대한 호기심이 더 컸고, 포토에세이 원고 때문에 사진촬영을 하러 찾아왔던 삼청동 거리는 고등학교 시절의 환상에 비해서는 그리 예쁜 곳이 아니었다.
오랜만에 찾은 삼청동 거리는 여태까지 보아온 삼청동 중에서 가장 예뻤다.
생각해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거리인데 약간 쌀쌀한 봄날씨가 좋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1년이 되어서 극장에서 항상 좋은 영화만 본 것 같다.
'아이엠러브'를 시작으로 '그대를 사랑합니다','블랙스완','세상의모든계절' 모두 내게 좋은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2011년이 아니라 내가 여태껏 보아온 영화를 통틀어서도 쓸쓸한 축에 속하는 영화이다.
혼자라는 것을 즐길 수 없는 나이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는 혼자가 될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영화이다.
노년은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과는 다른 또 하나의 계절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부부인 톰과 제리는 주말이면 농장에 가고 평소에도 서로를 아끼며 소박하지만 행복한 삶을 산다.
그들의 행복이 부러워서일까.
그들을 찾아오는 이들 중에는 외롭고 쓸쓸하고 구제불능인 이들이 많다.
이들의 친구인 켄과 메리가 대표적인 이들이다.
켄은 이제 자신이 좋아하는 펍에서 시간을 보내기에는 자신이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고, 메리는 자신의 나이를 인정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젊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소녀같은 감정적 사랑을 원한다.
그 덕분에 메리는 젊은 남자를 꼬실 생각을 하고, 심지어 친구인 톰과 제리 부부의 아들까지 탐낸다.
사랑받기를 원하고 외로워하는 그녀이지만 철없는 그녀를 환영해주는 이들은 거의 없다.

마이크 리 감독의 시선은 굉장히 차갑다.
영화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메리에 대해 따뜻한 시선이 아니라 냉정한 시선을 보낸다.
덕분에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메리의 쓸쓸함이 크게 느껴진다.
이 영화는 나이가 많을수록 더 많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이다.
극장 안에 영화 속 노부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시는 어르신들이 많으셨는데 아마 그 분들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이 영화 속에서 보고 느끼셨을 것이다.
노년의 쓸쓸함에 대해서 이 영화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서 보여준다.
영화의 챕터가 사계절로 나뉘어져있지만 내게는 사계절이 내내 쓸쓸하게만 느껴졌다.

톰과 제리 부부는 앙숙과도 같은 이름을 가졌음에도 굉장히 행복하게 산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행복한 이유는 자신의 인생이 겨울에 이르렀을 때 겨울에 해당하는 삶을 살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메리는 자신이 여전히 여름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젊은 시절의 자신과 같은 삶을 살려고 한다.
노년에게는 노년에 맞는 삶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메리는 이제 60대이지만, 그녀는 여전히 큰 왕리본 머리띠를 하고 가슴이 깊게 파인 드레스를 한 20대의 삶을 살려고 한다.
반면 톰과 제리는 젊은 시절의 화려한 삶은 없어도 주말에는 농장에 가고, 서로에게 불꽃이 튀는 감정이 없어도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아이엠러브'의 틸다 스윈튼, '블랙스완'의 나탈리 포트만의 연기도 좋았지만, '세상의 모든 계절'의 레슬리 맨빌이 보여준 쓸쓸함은 굉장히 큰 여운을 남긴다.
레슬리 맨빌은 몸만 늙었을 뿐 격정적인 사랑을 원하며 여전히 높은 콧대를 가지고 있고, 쉽게 상처입는 소녀의 마음을 가진 이의 삶을 너무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 마지막에 클로즈업된 레슬리 맨빌의 얼굴을 보면서 느낀 쓸쓸함은, 이제 막 찾아온 바깥의 봄 날씨를 잊게할만큼 서늘했다.
메리의 쓸쓸함이 상영관 안에서 전염되는 것이 느껴졌다.
행복하게 늙는다는 것의 의미와 내 나이에 맞는 삶을 사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느라 제법 오랜 시간 극장 밖을 돌아다녔다.
극장을 빠져나와서 삼청동, 인사동, 광화문을 연이어 걷는 내내 길에서 보아온 수많은 이들의 얼굴에서 쓸쓸함만 찾아다닌 것 같다.

톰과 제리 부부 같이 사는 이들도 내 주변에 있고, 메리와 같은 성격을 가진 이도 내 주변에 있다.
영화 보는 동안에도 메리를 보며 내 주변에도 저렇게 눈치 없고 답답한 인간이 있지, 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영화의 후반부에 들어서는 그녀를 동정하고 함께 슬퍼하기도 했지만 아마 그녀와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나면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기는 힘들 것 같다.
그녀에게 형식적인 호의를 보여줄 수 있을지언정 진심으로 그녀를 보듬어주고 손을 내밀 자신이 없다.
사랑받기를 원하고 누군가와 막연하게 대화를 하고 싶을 뿐인데 그것조차 허락되지 않은 노년의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일까.

극장 안에서 쓸쓸함과 마주한 채 두 시간 앉아있었던 기분이다.
영화의 초중반에 보이는 행복한 노부부의 삶을 보면서 가족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줄 알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쓸쓸함에 대해서 곱씹게 된다.
성숙해진다는 것과 외로움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외로움에 익숙해지는 나이가 있을리 없다.
늙는 것이 두려운게 아니라 외로운게 두려운 삶을 우리는 살아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