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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사과 (Sa-Kwa, 2005)



여태까지 본 영화 중에서 연애에 대해서 가장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이다.

스토리도 굉장히 평범한 연애 영화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 평범한 이야기가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실제 우리들의 연애는 멜로영화에서 보아온 특별함보다 평범함이 주를 이루지 않던가.
영화는 한 여자의 연애를 보여주는데 그 모습에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연애를 떠올릴 수 있다.
대사들 대신에 놓여진 여백들을 우리가 했던 연애의 풍경들로 채워나가면서 보게 되는 영화이다.

실제 연인들을 취재해서 쓴 각본 때문일까.
영화 속 상황들과 대사들이 영화가 아니라 실제 같다는 느낌을 많이 준다.
사랑에 빠지고, 이별하고, 또 다시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그 순간순간의 디테일이 굉장히 풍성해서 공감이 더 많이 된다.
직접 부딪치는 순간보다 생각하는 순간이 더 많은 우리들의 연애처럼 이 영화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감정에 대해서 설명하기보다는 여백을 두고 그 여백을 관객이 채워나가게 한다.
대사들의 경우에는 일상적이지만 파급력이 큰 대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멋있다라고 생각하는 대사보다 나도 그랬었지라고 공감하는 대사가 많은 영화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들이 중심축을 이루는 영화여서 더 좋았다.
문소리, 김태우, 이선균 세 배우 모두 정말 멜로에 잘 어울리는 배우이다.
예쁘고 잘생긴 외모의 배우들에게 어울리는 멜로영화는 실제 연애보다 판타지에 가까운 연애를 보여주는 멜로영화이다.
'사과'의 현실적이고 담담한 연애의 풍경을 세 배우는 연기가 아닌 실제처럼 보여준다.
문소리는 매 작품마다 감탄하게 하는 배우이지만, '사과'에서의 그녀는 연애를 하고 이별을 맞이하고 결혼을 하는, 사랑 앞에 서있는 여성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행동과 표정을 이 영화 속에서 다 보여준다.

문소리의 어머니로 등장하는 최형인의 연기가 좋아서 더 그렇겠지만 영화 속에서 남녀관계 이외에도 모녀 관계가 굉장히 흥미로웠다.
남자들이 많은 집안에서 자란 나로서는 엄마에게 딸이 특별하다는 의미에 대해서 이 영화를 보며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좋은 상황과 대사들이 굉장히 많은 영화이다.
매 순간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열심히하지는 않은 것 같다, 라는 대사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이 되는 대사라고 생각한다.
사랑을 열심히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고민을 해봐야할 것 같다.

영화 속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은 여자가 남자에게 내게 바라는 것이 없냐고 묻자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없다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고 편할까.
상대방에게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그것이 너무 많은 이해심이라고 할지라도 많은 섭섭함을 불러일으키지 않을까.
너무 많은 이해심과 무관심은 쉽게 동의어가 될 수 있는 말이다.
욕심을 동반하지 않는 애정이 어디있겠는가.
우리는 수련을 하는 수도승이 아니라 감정을 교류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사랑하는 이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말이 몹시도 슬펐다.

사랑을 바랄 때는 떠나있고, 혼자 있고 싶을 때는 사랑을 바라고,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별하는 순간까지 항상 엇갈려 있던 남녀는 서로 한 번 씩 참아주고 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에는 끝을 맞이한다.
처음부터 엇갈렸음에도 견디고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나아가던 관계 속에 서로 마주하는 시간을 줄어들었다.
마주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순간부터 해결해야할 문제들은 해결되지도 않은 채 계속 보류인 상태로 시간이 흘러간다.
결국 문제에 대해 함께 의논하지도 못한 채 오랜시간 견뎌오던 보류 상태의 문제를 미완으로 남기고 이별을 맞이한다.
문제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고 나 혼자 견디는 것은  배려가 아니라 소통의 단절이다.

헤어질 때 너를 만나면서 나 자신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다며 헤어지자고 하는 남자는
다시 만나자는 말을 할 때 그 당시에는 내가 나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해서 그랬던 것 같다고 말한다.
아마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이 남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자기 자신의 더 나은 삶에 이 여자를 추가하기 위해서 다시 찾아온 것이 아닐까.

누군가를 싫어하는 이유는 말할 수 있지만 좋아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분명히 말하기가 힘들다.
상대방이 나를 사랑해준다는 것이 내가 상대방을 좋아하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영화 속 남녀들은 나란 놈이 실제로는 이상한 놈인데 너는 그런 나를 알고 좋아하는거냐, 라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결혼 후 남녀의 관계도 흥미로웠다.
여자는 결혼을 도박처럼 하고, 남자는 대학가듯이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영화는 누가 잘못했다고 답을 내리지 않는다.
영화 속 인물들은 서로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 대신에 미안하다는 뒤늦은 사과를 선택한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는 그것뿐일지도 모른다.

서로 자기 사랑에 떳떳해지기 위해서, 상대방을 위해서 노력하는데 정작 그들은 상대방이 원하는 것과 정반대로 나아간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많이 느낀 감정은 씁쓸함이다.

풋풋한 사과향이 나는 로맨스보다는 누군가에 대해서 사과를 한다는 의미로 쓰이기에 더 적합한 제목 같다.
'사과'의 장면들을 편집해서 일본 뮤지션 harvard의 'clean&dirty'의 뮤직비디오로 사용했는데,
'사과'를 보고나서 가장 먼저 떠올린 노래는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