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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밤과 낮 (Night And Day , 2007)



'밤과 낮'을 보기 전에 걱정한 건 어차피 동어반복인 홍상수의 영화의 러닝타임이 어떻게 2시간 30분이 될 수 있는가, 였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후로 거의 가장 좋았던 작품이었다.


북한에서 온 유학생 역할을 맡은 이선균은 잠깐 나오는데도 너무 웃겼다.

이선균 목소리로 북한사투리라니.

오랜만에 얼굴 보는 황수정도 반갑게 느껴졌다.

'허준'으로만 기억된 배우가 이런 대사들을 소화하다니.


최근작들로만 홍상수를 기억하다가, 청어람과 영화사 봄의 타이틀에 있고, 영화촬영지도 파리라는 것까지 여러모로 낯설었다.

배경이 파리인 건 썩 중요하지 않다.

여전히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는 그걸 알고도 보게 되는 영화니까.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을 언급한 이유는, 그의 작품 중에서 서사가 뚜렷한 작품이 몇 개 안 되기 때문이다.

'밤과 낮'도 러닝타임이 긴만큼, 뻔한 대화의 나열이 아니라 나름의 서사가 존재한다.

그래서 더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원초적으로 시작해서 원초적으로 끝난다.

원초적 욕망을 쫓는 서사는 홍상수가 늘 해오던 방식이다.

꿈이 등장하는 영화는 대부분 작위적이거나 촌스럽게 삽입되는데, 애초에 테마 자체가 욕망이다 보니 홍상수 작품에서의 꿈은 서사의 진행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윤대녕이나 하루키 소설에 나오는 별 말 안 해도 매력 없는 남자들보다 차라리 홍상수 영화 속 속물적인 거 다 보여주는 남자가 볼 때도 더 편하다.

홍상수가 가진 희소성은 모든 이들이 다 꺼려하는 속물성을 보여주는 데 있다.

그 속물성에 웃고 불쾌해하다가도, 어느새 그 지점을 나에게서 발견한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고 실망한 뒤로 안 보다가 이전작들 살펴보고 있는데 역시나 웃기다.

알고도 당한다.

필립 가렐 영화는 봐도 이해도 잘 안 되는데, 홍상수 영화는 한국말로 편하게 볼 수 있는 프랑스영화 같다.

다만 그가 현재 가고 있는 지점이 내가 그의 영화를 좋아했던 이유와는 좀 멀어진 것 같아서 아쉬울 뿐.

그의 최근작들을 봐야겠다는 생각을 '밤과 낮' 덕분에 다시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