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의 자유는 늘 고민해야할 문제다.
래리 플린트는 대중들이 보기에 천박해보일 수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표현대로 그가 '최악'이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를 대변하는 사람이 됐다.
역사에서 이런 아이러니는 늘 흥미롭다.
우디 해럴슨은 꽤 많은 좋은 작품에 주조연으로 나오는데 정말 상복이 없는 것 같다.
그의 존재감에 비해 연기톤이 과장되어 보여서 그런 걸까.
'래리 플린트'를 처음 알게 된 게, 베를린영화제 황금곰상 수상 당시에 여우주연상을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줄리엣 비노쉬가 받아서 야유가 터졌다는 일화 때문이다.
코트니 러브가 '래리 플린트'에서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약물중독이나 스트리퍼 등 자신의 삶과 닿아있는 부분이 많다.
어떤 배역은 자기 자신과 너무 닮아서 다시 오기 힘든 기회인데, 이럴 때 수상하지 못하면 배우 입장에서는 많이 아쉬울 듯.
막판에 에드워드 노튼이 길게 변론하는 부분은 이 영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음에도 영화의 마무리를 위해서 꼭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이 영화가 공개된 1996년과 지금, 자유는 잘 보장되고 있는가.
곱씹어볼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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