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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캐롤 (Carol, 2015)

 

 

피키디리 극장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봤는데 기억 못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cgv로 바뀌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알았다.

 

'캐롤'은 워낙 평이 좋아서 기대하고 봤다.

잘 짜여진 영화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감정적 울림이 엄청나게 크지는 않았다.

크리스토퍼놀란의 영화만큼이나 꼼꼼한 짜임새를 보여주는 영화다.

토드헤인즈의 완벽주의를 엿볼수 있는 영화였다.

 

서사 자체가 그렇게 잘 짜여진 영화는 아니다.

도식화된 상징들도 꽤나 보이고, 흔히 볼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영화다.

즉, 이야기 이외에 영화를 채울 요소가 무척이나 많다는 것이다.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참고했다는데, 영화의 어느 지점에 멈춰도 마음이 흔들릴 만큼 매혹적인 미쟝센으로 가득하다.

에드워드 러취맨의 촬영, 샌디 포웰의 의상, 카터 버웰의 음악까지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거의 완벽에 가깝다.

정서적 울림을 위해서 필요한 장치들이 거의 완벽하게 설치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신은 디테일 속에 산다는 말처럼, '캐롤'은 영화의 디테일들이 모여서 정서적 감흥을 이끌어내는 경지를 보여준다.

 

케이트블란쳇의 모자가 계속 아른거린다.

언제 봐도 아름다운 그녀의 머리색과 함께.

그녀를 보면 '교양 있다'라는 수식어를 떠올리게 된다.

메릴스트립만큼이나 연기의 폭이 넓은 배우이기도 하고, 목소리만 들어도 매혹당하게 된다.

 

칸영화제에서 루니마라가 엠마누엘베르코와 여우주연상을 공동수상한 것으로 논란이 되기도 했다.

루니마라와 케이트블란쳇이 함께 받았어야 한다는 평이 많았는데, 영화를 보고나니 더욱 공감하게 된다.

루니마라의 연기도 정말 좋았지만, 케이트블란쳇이 계속해서 떠오른다.

 

루니마라는 오드리헵번과 나탈리포트만을 닮았다고 느꼈지만 볼수록 그녀만의 매력이 보인다.

'소셜네트워크'와 '그녀'에서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긴 그녀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는 처음으로 봤는데, 살짝 들려있는 입술이 참 매력적이다.

그녀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는 영화다.

사랑을 깨닫고 성장한다는 면에서는 '가장 따뜻한 색 블루'도 떠올랐다.

 

원작소설 작가인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실제로 백화점에서 어떤 여인을 보고 느낀 강렬함을 계기로 쓴 소설이라고 한다.

당시 느낀 감정을 단숨에 써내려갔는데, 그 시기에 수두에 걸려서 열병을 앓았다고 한다.

몸이 아픈 것을 사랑의 열병으로 생각할만하고, 마침 그런 시기에 쓰였기에 이런 소설이 탄생할 수 있지 않았을까.

 

토드헤인즈는 작품 사이의 텀이 긴 감독이라 그의 차기작을 만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다.

사실 '캐롤'의 감정선을 충실히 따라가긴 힘들었다.

예쁜 화면과 꼼꼼한 연출에 감탄하다보니 어느새 영화가 끝나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 같다.

 

사실 내겐 성별보다도 계급이 훨씬 더 크게 보인 영화였다.

욕망에 대해 솔직해질 수 있는 여유조차 계급으로 정해지는 느낌까지 받았다.

어느 사회에서나 비슷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계급을 전복시키는 순간도 욕망에서 시작된다.

자신이 종속되어있던 계급양식에서 이탈하는 순간은 대부분 욕망에 충실할 때이다.

 

내가 지금 가진 것을 잃더라도 가지고 싶은 사람이 생긴다는 것.

이성적으로는 결코 판단하기 힘든 일이다.

그것을 이뤄내는, 남들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그런 순간을 누군가는 두려워하고 누군가는 낭만적으로 여긴다.

 

그런 순간이 온다면 두려움과 기쁨 사이에서 어디에 방점을 찍을지 고민하겠지만, 기쁠 것 같다.

아직 내게도 이렇게 욕망에 솔직할 용기가 있다는 것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