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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사울의 아들 (Saul fia , Son of Saul , 2015)

 

 

 

왓챠 어플을 사용한 이후로 안 좋은 습관이 생겼다.

영화를 보는 내내 몇 점 줄지 계속 계산하게 된다.

 

왓차 어플을 사용하면서 매기는 4.5점과 5점의 차이는 뭘까.

좋은 짜임새를 가졌으나 분석하게 되고 프레임 밖을 떠올리게 되면 4.5점을 주고,

짜임새가 좀 헐겁더라도 완전히 몰입하고 프레임 속에서 체험을 하게 되면 5점을 주는 것 같다.

 

'사울의 아들'은 영화적으로 훌륭한 선택을 한 영화다.

덕분에 보는 내내 영화의 짜임새에 대해 생각했고, 러닝타임 막바지에 가서야 비로소 몰입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시체처리반에서 포로 신분으로 일하는 사울이 어느날 자기 아들의 시체와 마주하게 된다.

자기 아들의 시체를 소각시키지 않고, 장례를 치뤄주기 위해 사울은 노력한다.

 

아우슈비츠에 대한 영화는 넘치고 넘친다.

'사울의 아들'은 아우슈비츠 속 한 개인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아우슈비츠의 풍경을 보여줄 법도 한데, 철저하게 사울에게 집중한다.

덕분에 '지켜보던' 풍경이 '체험하는' 풍경이 된다.

 

사울의 행동은 답답하기까지 하다.

자신을 비롯한 모든 포로들의 죽음보다도 죽은 아들의 장례에 온신경을 쏟는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안티고네, 순교자, 미친사람 그 어디에 속해도 어색하지 않다.

 

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는 현장에서 '장례'라는 가장 인간적인 행위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죽은 이의 장례를 치뤄주면서 회복하는 존엄성은, 포로 신분으로 시키는 대로 시체를 소각하는 순간들 속에서 숭고함을 가진다.

실존이란 이렇게 탄생하는 것이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몇 가지 질문들이 생긴다.

애석하게도 그 질문들은 금방 휘발된다.

역사가 모든 답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전쟁 속에서 무엇을 지킬 것이냐는 질문 이전에 인간으로서 무엇을 지켜내며 살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영화다.

내가 사울에게 숭고하다는 말을 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의 행동은 내가 못하는 짓이라고 규정짓고 무작정 숭배하며 순교자에게 모든 짐을 떠안게하려는 것은 아닐까.

숭고함은 종교처럼 숭배하고 불가침영역으로 생각할 부분이 아니라 곁에 두고 자신과 동일시해야할 부분이다.

 

난 속물이야, 숭고한 것은 나 같은 속물이 감당할 영역은 아니니 순교자들에게나 기대하자.

이런 말로 합리화하고 뭉뚱그렸던 부분을 다시 꺼내보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사울에 대해 많은 시간 떠올리진 않을 것이다.

다만 스스로에게 묻는 몇몇 질문 속에 사울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매일매일 소각하는 가치와 시간, 그 속에 마치 내 자식처럼 여기고, 죽었음에도 보듬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