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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그녀 (Her , 2013)




OS와 사랑에 빠진다.
너무 흥미롭지 않은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을 OS와 사람의 사랑으로 바꾸기만 해도 평범한 사랑 이야기는 깊이를 가지게 된다.
이 영화는 우리에게 사랑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진다.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작품이다.
그는 인공지능을 가진 컴퓨터와 채팅을 하다가 질문에 대한 답이 한정되어서 금방 실망하긴 했지만, 이런 시스템이 좀 더 발달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에서 이 영화를 떠올렸고, 5주만에 초고를 썼다고 한다.
사실 스파이크 존스가 '존 말코비치 되기', '어댑테이션'같은 명작을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찰리 카프만의 각본 때문이라는 편견이 있었는데, 그가 이렇게까지 좋은 각본을 썼다는 사실에 놀랐다.
찰리 카프만와 여러모로 비슷한 감성을 지닌 감독이라고 느꼈다.

뮤직비디오 감독 출신인 그의 영상은 차가워야할 순간과 따뜻해야할 순간을 무척이나 잘 알고 있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뮤직비디오를 찍기도 했던 그는, 이번 영화의 음악을 아케이드 파이어에게 맡겼는데, 최고의 선택이라고 할 만큼 음악이 영화의 분위기를 잡아주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몇 십 년 뒤의 미국으로 보이는 영화의 배경은, 사실 상하이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호아킨 피닉스의 집으로 나오는 장소는, 실제로는 현대미술관이라고 한다.

에이미 아담스가 자신의 이름인 에이미로 등장하는 것처럼, 사만다는 사실 이 영화의 제작자인,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예언자로 나왔던 사만다 모튼이 맡았었다고 한다.
다만 후반작업 중 다른 목소리가 낫겠다고 판단해서 스칼렛 요한슨이 사만다의 목소리를 연기하게 되었다고 한다.
촬영이 다 끝나고, 배우들과 합도 맞추지 못하고 혼자 녹음했을 텐데 이 정도의 완성도가 나왔다는 것이 놀랍다.
스칼렛 요한슨의 최고 연기도, 그녀가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목소리도 이 영화에서 나온다.
이 영화에서 우리를 매혹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신음소리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일상에 대해 속삭이는 장면에 있다.

스파이크 존스와 찰리 카프만을 떼어놓고 설명하기 힘들기에, 또한 사랑을 대하는 영화의 태도 때문에라도 자꾸 '이터널 선샤인'이 떠올랐다.
'이터널 선샤인'을 몇 번 보다보니 나중에는 커스틴 던스트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이 영화를 루니마라의 시선으로 봐야겠다고 느꼈다.
스칼렛 요한슨을 의식해서인지, 사람들 사이에서 OS와 사랑에 빠지는 주인공의 고립된 모습에서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게 OS인지 사람인지보다 사랑한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는 영화의 메세지에서는 '우리도 사랑일까'가 떠올랐다.
아마 시대가 지날수록 '누가'보다 '왜'에 방점을 찍는 사랑방식이 보편화되지 않을까 싶다.
나중에는 연애를 한다고 하면 '누구랑'이라는 질문보다 '왜'라는 질문이 먼저 나오는 시대가 오려나.

에이미 아담스는 '파이터' 때도 느꼈지만, 공감하고 지지할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하는지를 무척이나 잘 아는 배우라고 느껴졌다.
스칼렛 요한슨의 목소리 연기가 화제인 영화이지만, 그래도 이 영화는 호아킨 피닉스의 영화이다.
그의 필모그래피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데, 콧수염에 안경을 써도 참 멋지고 섹시한 배우라고 느꼈다.
사랑에 빠졌을 때 남자들은 무슨 표정을 짓는지 묻는다면, 이 영화 속 호아킨 피닉스의 표정을 보여주고 싶다.

울컥하는 장면이 많다.
특히 사만다가 작곡한 노래에 가사를 붙이고, 그 노래에 맞춰 두 사람의 사랑이 절정으로 가는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은 마법처럼 느껴진다.
사랑이 절정으로 갔다가 점점 식는 그 광경은, 사람이나 OS나 똑같다.

존재 자체에서 만족하는 건 동경이고, 소유하고 싶어지는 것은 사랑일까.
이 영화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야겠다기보다, 질문을 던지는 그 풍경 자체가 좋았다.
OS인지 사람인지 그게 뭐가 중요한가.
사람이 무엇인가에 헌신하고 푹 빠져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사랑에 빠진다는 사실 자체가 거대한 환상이 되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누군가가 나를 보며 사랑에 빠졌다고 말해주는 일을 평생 동안 겪을 수나 있을까.
문득 불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