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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봄날은 간다 (One Fine Spring Day, 2001)




'봄날은 간다'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연애라는 단어가 그리 무게감 있게 다가오지 않던 고등학교 때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 본 것도 아니다.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반복해서 보았다.

'8월의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이다.
내게 허진호 감독의 초기작 두 편은 숙제와도 같은 영화이다.
좋은 멜로, 공감해야만 하는 멜로처럼 느껴졌다.
남들도 느끼는 그 공감의 감정을 나도 느끼고 싶어서 계속해서 보았지만 두 영화 모두 내게는 별 감흥 없었다.

이제 개봉한지 10년도 더 된, 2001년도 작품인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보게 되었다.
2000년도가 낯설게 느껴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 전이라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여전히 내게는 별 공감 안 되는 영화로 낙인 찍힌 이 영화가 지금의 내게는 어떻게 느껴질지 궁금했다.

가슴이 먹먹하거나 눈물이 날 것 같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오히려 홍상수 영화를 볼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했다.
많이 웃었고, 창피했고, 달달했고, 화가 났다.

러닝타임이 너무 짧게 느껴졌다.
사랑이 너무 빨리 달아오르고 너무 빨리 식는다고 느껴졌다.
아무렇지 않게 매달리고, 다시 잡고하는 식의 과정이 왜 이리 어색하던지.

이영애가 참 나쁜 여자로 나옴에도 정 붙이고 계속해서 이 영화를 볼 수 있어던 이유는 역시나,
예쁘기 때문이다.
정말 온갖 수식어를 다 붙여도 될만큼 예쁜 배우임을 새삼스레 다시 느낀다.

대사가 많지 않은데, 그 적은 대사들 모두 참 잘 쓰여졌다고 느꼈다.
라면 먹고 갈래요, 좀 더 친해지면 해요, 창피해, 함께 있으니까 좋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라는 대사가 제일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영애가 천진난만하게 자기 속을 숨기고 뱉는 대사들이 좋았다.

청년의 나쁜 여자 체험기랄까.
어떤 의미에서 좋은 멜로라는 수식어를 붙인걸까.
삐딱하게 봐서 그런지 몰라도, 과거의 자신의 연애를 포장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이 영화를 포장하는 효과를 가져오지 않았나 싶다.

쿨하다는 말을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증오한다.
훗날 생각하면 얼굴이 화끈거릴만큼 찌질하고 질척거리는 게 연애라고 생각하기에,
그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쿨하다라는 말로 어떻게든 포장하고 넘어가려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한다.
감정과 감정이 섞이는 과정인데 퍽이나 쿨하겠다.

사운드 엔지니어로 등장하는 상우의 녹음기 안에는 어떤 소리가 들려있을까.
영화 마지막에 들판에서 유지태가 듣고 있는 소리들은 영화 마지막에 보여준 상우의 표정처럼 평화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온갖 불협화음과 충돌음들을 듣고 있을 것이다.
다만 이젠 거기에 익숙해지고, 모든 것을 인정해버려서, 더 이상 웃지 않고는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꺠달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