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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이터널 선샤인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 2004)



감동은 결국 관객이 가지고 있는 추억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터진다고 생각한다.
지금 볼 때는 별로인 영화가 훗날 많은 추억을 만든 뒤에 보았을 때, 그 사이 생긴 추억으로 인해서 그 영화에 감동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 다닐 떄 이 영화를 처음 봤다.
예나 지금이나 '존 말코비치 되기'는 내 베스트영화 중에 하나이기에, 찰리 카프먼의 새로운 각본이 궁금해서 보았다.
기발한 발상이다라는 정도의 감흥만 있었을 뿐, 정서적 감흥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모든 이들이 이 영화를 극찬해도 나는 시큰둥했다.

몇 년이 지난 뒤 이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영화의 몇몇 이미지나 대략의 줄거리는 기억나지만, 거의 새로운 영화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일단 전에 봤을 때보다는 일단 정서적 감흥이 컸는데, 주인공 커플이 아니라 커스틴 던스트가 연기한 매리라는 캐릭터 때문이다.
제일 인상적인 장면도 매리가 나오는 두 장면이다.

하나는 매리가 조엘의 집에 찾아온 병원 원장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 뒤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코끼리를 구경하는 장면을 붙여놓고, 그 뒤에 두 사람이 입 맞추는 장면을 배치한 부분이다.
매리와 병원 원장 앞에는 기억을 지워달라고 했지만 기억을 복기하는 과정에서 연인과의 기억을 살리고 싶어서 기억을 역주행하는 남자가 있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코끼리가 주는 판타지적 이미지와 이미 기억을 지운 매리의 과거까지 더해져서 굉장히 다양한 감정이 담긴 슬프고 아름다운 장면이 되었다.

또 한 장면은 매리가 병원 원장에게 사랑을 고백한 뒤에,
원장의 부인이 조엘의 집에 찾아와서 이들을 목격하고, 매리에게 '불쌍한 아가씨'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이 부분에서 원장의 부인이 매리를 보며 짓던 표정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다.
이 표정 하나에 병원 원장, 원장의 부인, 매리의 비참한 심정이 다 담겨있다.

짐캐리와 케이트윈슬레으로 기억되는 영화인데,
앞으로는 커스틴 던스트부터 떠오를 것 같다.
영화 보는 내내 매리가 너무 불쌍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DVD에 수록된 삭제 장면에 따르면 매리가 기억을 지우기로 결심한 이유도 낙태 때문이다.

영화 제목은 고전 러브스토리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의 서신 왕래를 읽던 찰리 카프만이 알렉산더 포프의 '엘로이즈가 아벨라르에게'라는 시의 한 구절인  ‘순결한 마음의 영원한 빛(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서 따왔다.
알렉산더 포프의 시에서 엘로이즈는 이런 말로 편지를 맺는다.
'괴로움을 가장 크게 느끼는 자, 괴로움을 가장 잘 그리리라.'

몇 년 사이 내 기억에서 찰리 카프만의 영화로 기억된 이 영화가 앞으로는 매리의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