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

그 후 (The Day After , 2017)



좀 놀라웠다. 전혀 기대를 안 했으니까.

'밤의 해변에서 혼자'부터 홍상수가 연출자 이상으로 과잉된 모습을 보이는데 실망했고, '클레어의 카메라'에서 이방인 이자벨 위페르는 이전 배역들 때문에라도 내가 홍상수 영화에 실망한 이유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후'는 그 지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

아마 김민희에 포커스를 맞추다가 사이드로 조금 빗겨나가면서 홍상수의 이전 스타일이 다시 나타난 걸지도 모른다.

자전적 요소 같은 건 떠나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정서를 다시 만났다.

언제나 그의 데뷔작에 보여주는 정서를 선호했기에 반가웠다.

다시 생생하게 움직이면서 죽음의 기운이 흐른다.


김새벽의 대표작이 '한여름의 판타지아'인 것도 몰입에 도움이 됐다.

그녀의 이전 배역이 떠오른 덕분에 오히려 이 영화에 플러스 되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홍상수의 스타일이 바뀐 것과 별개로 김민희의 연기는 계속 전진 중이다.

형이상학적인 홍상수의 대사들을 이렇게 세련되게 소화할 배우는 김민희 뿐일 거다. 

다만 홍상수가 아닌 감독과도 작업하는 그녀가 보고 싶다.


늘 홍상수스럽던 캐릭터에 권해효가 캐스팅 되고, 감독이 아닌 출판사사장 역할을 한 덕에 좀 더 편하게 볼 수 있었다.

내가 홍상수 영화에 진입할 수 있던 그 지점의 여지가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아름답다'와 '예쁘다'의 매력은 휘발한 채 진행되지만, 그의 영화에서 느끼던 매력을 최근작 중에서는 오랜만에 느꼈다.


'풀잎들'과 '강변호텔'에서도 이런 느낌을 다시 받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