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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건축학개론



좋았다.
아니, 이 영화를 안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금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 중에 90년대를 지나오지 않은 이가, 첫사랑의 기억이 없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좋아하는 배우들이 나온다고 하기에, 영화의 캐스팅 소식만 듣고도 굉장히 기대를 했다.
아역과 성인연기자의 외적인 모습이 너무 달라서 안 어울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영화를 보면서 15년이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심지어 기억까지도 모조리 바뀔 수 있는 기간이라고 느꼈다.

누군가를 15년 동안 기억해 왔다면 짧은 수도 있겠지만, 그 15년 동안 추억은 계속해서 가공되고 포장된다.
지금 내 옆에 그 사람을 두지 못하고 추억으로 곱씹을 수 밖에 없는, 후회스러운 기억들을 포장해가며 하루하루 견뎌나가는 것이다.
아니, 대상에 대한 기억은 지워가고 나 자신에 대한 포장만 더해가며, 추억의 알맹이는 버려지고 껍데기만 예쁘게 포장하는 시간들이 이어진다.

영화 속 과거와 현재, 승민은 항상 수동적이고 솔직하지 못하다.
첫사랑 앞에서 그는 열등감에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판단해버린다.
자신의 첫사랑을 '썅년'으로 부르는 것은 결국 용기없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도피성 발언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런 승민의 태도는 사랑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나쁜 남자로 기억되기에 충분하다.

첫사랑에 대한 엇갈린 기억이 다시 바뀔 수 있는 것은 서연 덕분이다.
자신의 삶을 수습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서연에 의해 영화는 진행된다.
추억을 고치기 위해, 집을 고치기 위해 승민을 찾아왔고, 그렇게 꽉 닫혀있는 서로의 추억은 공유되고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하다.
물론 집을 새로 짓는 대신 증축을 선택한 것처럼, 과거의 감정은 추억 속에 이미 묻혀버린지 오래이기에, 이들의 추억도 조금의 수정만 가해질 뿐, 이들은 전과 비슷한 무게의 추억을 가지고 서로의 자리로 돌아가게 된다.

결국 실패한 연애담에 대한 이야기이자 반성문과 같은 이야기이다.
추억을 신격화시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짓이다.
반성하고 인정하는 것, 결국 승민과 서연의 만남도 서로의 과거, 과거의 과오를 인정하기 위한 만남이 아니었을까.

관객들이 영화 속에서 가장 많이 보게 되는 장면은 정릉도, 제주도도 아니라 자신의 추억일 것이다.
어떤 추억을 가지고 극장에 들어서냐에 따라서 영화가 끝난 뒤 느끼는 감흥의 정도도 다르지 않을까.
'시라노 연애조작단'을 봤을 때와 마찬가지로 찌질한 남자들의 이야기가 짜증나기보다 슬퍼보이는 것도 내가 얼마나 멍청하게 과거를 회상하고 있는지에 대한 증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