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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헤이와이어 (Haywire , 2011)



일단 난 꽤나 재미있게 봤지만, 딱 그정도이다.
킬링타임용 액션영화.
가장 많이 떠오른 영화가 '마셰티'였다.
물론 '마셰티'보다 유머는 훨씬 덜하지만.
어쨌거나 내겐 킬링타임용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스티븐 소더버그가 연출했기 때문에 당연히 큰 기대를 했고, 영화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영화는 소더버그가 연출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서 정말 자신이 찍고 싶은 것을 찍은 영화이다.
'머니볼' 연출에서 해고된 뒤, 마침 그 당시 처음으로 패배를 겪은 여자 이종격투기 선수와 만나서 찍게 된 영화가 바로 '헤이와이어'이다.
우연히 텔레비전에서 지나 카라노가 경기하는 장면을 본 뒤 반해서 촬영을 제의하게 되었고, 마침 경기 패배 뒤에 다른 경험을 찾고 있던 지나 카라노는 그 제안을 승낙하게 된다.

일단 스토리 자체는 본 시리즈를 지향하고, 전문배우가 아닌 격투기 선수를 캐스팅했다는 것에서는 스턴트맨을 직접 배우로 출연시킨 타란티노의 '데쓰프루프'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 영화의 시나리오는 본 시리즈나 타란티노의 영화에 비하면 설득력도 떨어지고 매력도 별로 없다.
지나 카라노가 몸으로 표현하는 다양한 장면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심과 최소한의 스토리는 줘야된다는 두 강박이 만나서 이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 영화의 완성도는 조금 떨어져 보일지라도 스티븐 소더버그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다양한 장르를 소화해내고, 아무렇지 않게 또 하나의 걸작을 만들어낼 것이다.
'헤이와이어'는 스티븐 소더버그의 전작들과 아예 지향점부터 다른 영화이다.
여전히 스티븐 소더버그의 욕심은 영화에 많이 묻어난다.

거의 무성영화에 가깝다.
대사도 거의 없고, 지나 카라노의 경우 감정 연기보다는 몸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녀의 몸짓에 매혹되느냐 안 되느냐가 이 영화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는 순간일 것이다.

지나 카라노의 액션장면에서는 음악이 안 나온다.
그녀의 액션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스티븐 소더버그가 그녀를 얼마나 신뢰하고, 그녀의 몸짓을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지가 느껴진다.

영화에 등장하는 남자배우들도 쟁쟁하다.
지금 헐리우드에서 가장 핫한 몸을 자랑하는 채닝 테이텀부터 실력 있는 감독들과 계속해서 작업 중인 마이클 패스벤더까지.
이완 맥그리거, 마이클 더글라스, 안토니오 반데라스 등 한 영화 속에서 다 보는게 믿지 않을만큼 많은 유명남자배우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들의 역할은 지나 카라노한테 두들겨 맞는 것이다.
이 쟁쟁한 남자배우들이 지나 카라노한테 두들겨 맞고 짧게짧게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 영화의 큰 재미 중에 하나일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그동안 봐온 화려한 음악과 현란한 편집으로 이루어진 액션영화가 양념범벅된 치킨이라면 이 영화는 그야말로 담백한 닭백숙이다.
닭백숙을 먹으며 자랐던 이들이 훗날 양념치킨을 먹다가 다시 닭백숙을 먹으면 추억에 빠져서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양념치킨만 먹던 이들에게 '헤이와이어'라는 담백한 닭백숙이 얼마나 밋밋하겠는가.

양념치킨과 닭백숙 중에 무엇이 더 맛있고, 더 맛있어야 하는지 정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저 취향일 뿐.
스티븐 소더버그가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고전영화의 작법을 가져왔다는 이유만으로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A급 스텝과 예산으로 만든 B급 영화라는 느낌이 강한 영화이다.
흑백무성영화 속 액션캐릭터를 지금의 젊은 관객들이 과연 견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