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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자유의 언덕 (HILL OF FREEDOM, 2014)

 

 

 

홍상수는 항상 시간에 대해 말해왔다.

홍상수는 시간의 속성에 대해 가장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감독이다.

그의 즉흥적인 작업스타일이 유효할 수 있는 것도 그가 항상 시간에 대해 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업 전에 카세료에게 일본에서 책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마침 가져온 책의 제목이 '시간'이었다고 한다.

완벽하게 세팅한 감독들에게도 풀기 힘든 이야기들이, 홍상수의 시선 안에서는 우연을 통해서 쉽게 풀어지는 이유는 그가 말하려는 메세지 때문일 것이다.

그는 항상 시간에 대해 말하고, 필연 같은 우연에 대해 그려낸다.

남들이 하나의 인위적인 세계를 구축할 때, 그는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삶을 고스란히 담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편지를 읽는 이가 편지를 떨어뜨리고, 순서가 뒤바뀐 편지를 읽게 된다.

나이가 든 뒤에 삶을 돌아보다보면 인생에서 벌어진 사건들의 순서가 뒤바뀌곤 한다.

나의 경우 크리스마스에 혼자 씨네큐브에서 허진호 감독의 '행복'을 봤다고 오랜 시간 믿어왔는데, 최근 영화표 정리를 하다가 그 날짜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별과 만남, 행복과 불행 등이 순서따위 무시한 채 뒤죽박죽 엮여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카세료는 항상 '시간'이라는 책을 들고 다닌다.

책의 줄거리를 물으면 그저 시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말만 할 뿐이다.

누구나 이 책을 들고 다닌다.

누군가는 그 책에 대해 흥미를 보인다.

당신의 시간은 어떤가요.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시간에 호기심을 가지고 시간을 나눈다.

이별이란 서로 나눌 수 있는 시간의 단절을 의미한다.

 

홍상수의 시간 속에 갇혀있는 인물들을 보며 안타까운 순간들이 많았다.

아마 절정은 '옥희의 영화'였을 것이다.

사랑을 그려낼 때 사랑 그 자체를 그려내는 다른 감독들과 달리, 홍상수는 그저 덤덤하게 시간에 대해 말한다.

홍상수의 시간 속에 담긴 사랑들은 슬픔보다 안타까움에 더 가깝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려고 인과관계에 대해 따져보는 시간을 가지곤 한다.

출발점에 사랑이 있었으나, 시간을 복기해보는 과정에서 사랑은 휘발하고 사건만이 남는다.

멋대로 상상하고 서로를 원망하고 지우고 혹은 오해하고 해피엔딩을 꿈꾸는, 시간 속에 갇힌 이들만이 할 수 있는 미련한 짓, 그것이 사랑일지도 모른다.

 

죽음도 시간 안에서 맴돈다.

그래서 홍상수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항상 죽음의 기운이 느껴진다.

그가 데뷔작에서 죽음을 보여준 이유는, 앞으로 징후로만 느껴질 죽음에 대해 그 실체를 밝히고 시작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당신을 사랑한다는 고백 뒤에 다른 이성과 잠을 자는 장면을 배치시키는 것.

이것은 영화에서도, 시간에서도, 사랑에서도, 현실에서도 가능한 일이다.

시간 속에서 사건의 순서나 인과관계 등은 한없이 흐려지기도 한다.

행복과 불행의 순서 같은 것들은 시간 안에서 언제나 뒤섞이고 그래서 우리는 혼란스러워 한다.

 

진짜 행복을 들춰보려고 시간 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발견한 불행에 모든 것이 흔들리기도 한다.

아들과 딸을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삶을 급하게 마무리하기에는, 우리 삶을 흔드는 순간들이 무척이나 많다.

 

나는 지금 시간 안을 제대로 부유하고 있는 것이 맞을까.

언젠가는 제대로 걸어다닐 수 있을까.

제대로하는 부유란 무엇일까.

 

P.S 정은채와 김의성이 싸우는 장면 덕분에 상반기 통틀어서 가장 많이 웃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