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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밍량

구멍 (洞 , The Hole , 1998) 차이밍량식 재난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대만은 늘 외롭고, 그 외로움의 정도가 거의 재난에 가까운데 아예 재난을 배경으로 하니 그것도 흥미로웠다.'흔들리는 구름'에 나오는 뮤지컬 시퀀스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걸 알게 됐다.차이밍량 영화에 뮤지컬 장면이 안 나오면 배우들이 웃는 표정을 볼 기회가 없다. 차이밍량 영화를 보며 울림보다 지루함과 롱테이크에서 오는 압박감을 느낄 때가 많은데, '구멍'은 오히려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이다.아마 일상에 가까운 재앙 같은 설정 때문일까.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외로운 개인이 연결된다는 건 영화적으로 충분히 설득되는 메시지였지만, 그게 내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꽤나 아찔했다. 주변에 대만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데, 차이밍량 영화는 대만을 배경으로 하지만 '외로.. 더보기
떠돌이개 (郊遊, Stray Dogs, 2013) 영화소개 한 줄을 보고 끌렸던 경험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은 감독이나 배우들로 인해 영화를 본다. '떠돌이개'는 한 줄의 소개를 보고 끌린 영화다. 이런 경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인간 광고판이 되어 일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소개를 보고 단숨에 끌렸다. 게다가 감독이 차이밍량이다. 외로운 대만의 풍경이 절로 떠올랐다.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보고 며칠 지나지 않아서 '떠돌이개'를 봤다. 20년 가까운 세월의 차이를 둔 영화다. '애정만세'에서 애띤 얼굴을 하고 있던 이강생은 늙어 있었다. 침대 위에 잠든 남자에게 살며시 다가가 입을 맞추던 이강생은, 가장이 되어 두 아이를 위해 표지판을 들고 있었다.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 번째는 배우 이강생의 20년이 어떤 시간이었을까라.. 더보기
애정만세 (愛情萬歲, Vive L'Amour, 1994) 낮잠을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밤이 되면 잘 것인데 낮에 잠이 들면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영화를 본다. 보면 졸릴 것 같아서 망설였던 정적인 아트필름들 중에 한 편을 골라서 본다. 내가 본 영화의 절반 이상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봐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본 영화들이다. 그런 의무감으로 본 영화들이 내게 좋은 자양분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설날 오전에 가족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다가 낮잠을 잤고, 일어나자마자 미뤄둔 숙제처럼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봤다. 한 여자가 집을 팔기 위해 내놓는다. 우연한 계기로 그 집 열쇠를 손에 넣은 두 남자가 있다. 두 남자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각 밤이 되면 그곳에서 샤워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