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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매

구멍 (洞 , The Hole , 1998) 차이밍량식 재난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보여주는 대만은 늘 외롭고, 그 외로움의 정도가 거의 재난에 가까운데 아예 재난을 배경으로 하니 그것도 흥미로웠다.'흔들리는 구름'에 나오는 뮤지컬 시퀀스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는걸 알게 됐다.차이밍량 영화에 뮤지컬 장면이 안 나오면 배우들이 웃는 표정을 볼 기회가 없다. 차이밍량 영화를 보며 울림보다 지루함과 롱테이크에서 오는 압박감을 느낄 때가 많은데, '구멍'은 오히려 빠르게 전개되는 느낌이다.아마 일상에 가까운 재앙 같은 설정 때문일까.바닥에 뚫린 구멍으로 외로운 개인이 연결된다는 건 영화적으로 충분히 설득되는 메시지였지만, 그게 내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꽤나 아찔했다. 주변에 대만여행을 좋아하는 이들이 많은데, 차이밍량 영화는 대만을 배경으로 하지만 '외로.. 더보기
애정만세 (愛情萬歲, Vive L'Amour, 1994) 낮잠을 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차피 밤이 되면 잘 것인데 낮에 잠이 들면 괜한 짓을 한 것 같아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니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영화를 본다. 보면 졸릴 것 같아서 망설였던 정적인 아트필름들 중에 한 편을 골라서 본다. 내가 본 영화의 절반 이상은 보고 싶어서라기보다 '봐야할 것만 같은' 의무감에 본 영화들이다. 그런 의무감으로 본 영화들이 내게 좋은 자양분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설날 오전에 가족들과 함께 여기저기 다니다가 낮잠을 잤고, 일어나자마자 미뤄둔 숙제처럼 차이밍량의 '애정만세'를 봤다. 한 여자가 집을 팔기 위해 내놓는다. 우연한 계기로 그 집 열쇠를 손에 넣은 두 남자가 있다. 두 남자는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각각 밤이 되면 그곳에서 샤워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