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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파주 (Paju,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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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불친절한 영화이다.
한 번 보고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굉장히 은유적인 영화이다.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 시종일관 집중하고 매장면 속에 숨은 의미를 찾아야한다.
어느 평론가의 말처럼 이 영화는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영화의 내러티브 자체가 설명이 적고, 중간중간 생략된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많은 여운을 남긴다.
영화 속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들이 아니라, 인물들의 숨겨진 감정들과 인물들이 삼킨 말들을 발견하고 느끼는 것이 이 영화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난 이 영화의 그런 가치를 지지하고 싶다.
특히 많은 여운을 남겨주는 영화 마지막 부분에 서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장면은 같은 해에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마더'의 엔딩 장면의 군무 장면만큼이나 인상깊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를 싫어할 것이다.
마케팅은 처제와 형부의 사랑이어서 아마 보고나면 '낚였다'는 느낌이 들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흡사 '지구를지켜라'가 SF영웅물로 낙인찍힌 것처럼 마케팅의 실수다.
이 영화는 처제와 형부의 사랑이라는 소재도 있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내 개인적인 올해의 베스트영화이다.
'박쥐'보다 훨씬 좋았고, '마더'만큼이나 감동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이명세 감독의 '형사'인데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서 보는내내 설명못할 큰 감동을 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형사'를 좋아한다.
'파주'가 내게는 꼭 '형사'를 보았을 당시의 그 느낌이다.
슬픔도 즐거움도 아닌 설명할 수 없는 이 느낌이 내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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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순전히 서우라는 배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보기 바로 전에 '미쓰홍당무'라는 영화를 보며 서우가 이렇게 귀여운 캐릭터로 나오는데 박찬옥 감독의 영화에서는 어떤 진지한 모습을 보여줄지가 궁금했다.
일단 이 영화에서 서우라는 배우의 힘은 굉장하다.
서우가 소화한 캐릭터 자체가 대사가 아닌 표정으로 씬 자체를 온전히 이끌어가야하는 순간이 많다.
작은 체구의 서우는 자신의 표정으로 씬 전체를 이끌어간다.
이 영화의 오프닝과 엔딩에서 서우라는 배우의 표정이 없었다면 그 장면은 지금과 같은 가치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아이스크림 CF에 나올 때만해도 그녀는 그냥 예쁘장한 연예인으로 보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필모그래피를 보아라.
'미쓰홍당무'는 그녀가 좋은 시나리오를 받을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녀는 차기작은 놀랍게도 '미쓰홍당무'와는 정반대의 분위기인 '파주'였다.
게다가 그녀가 현재 촬영중인 영화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를 임상수 감독이 리메이크하는 '하녀'이다.
현재 우리나라 신인여배우들 중에서 서우만큼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가진 배우가 몇이나 있는가.
그녀가 지금과 같은 행보를 보여준다면 아마 얼마 가지 않아서 전도연만큼이나 시나리오를 잘 보는 여배우로 이름을 알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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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균은 영화 속에서 마치 순교자와 같다.
세상의 모든 죄를 자신이 다 짊어지고 가는 인물로 등장한다.
이선균이 영화의 마지막쯤에 감옥에서 내뱉는 대사는 영화를 숭고하게 만든다.
티비 속에서 보던 로맨티스트의 모습이 아닌 순교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선균의 모습이 어색하기 보다는 더 잘어울렸다.

이선균의 초기작품을 보면 지금과는 확연히 다르다.
데뷔 초의 이선균은 티비시트콤이나 상업코미디영화에 주로 등장했다.
이선균의 행보는 마치 미인대회 출신으로 데뷔해서 홍콩코미디 영화에 소비되다가 관금붕, 왕가위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파 배우가 된 장만옥을 연상시킨다.

이선균은 한예종을 1기로 졸업한 뒤에 정말 닥치는 대로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그에게 분기점이 되는 것은 이윤정 피디와의 만남이다.
이윤정 피디가 연출한 드라마인 '태릉선수촌','커피프린스1호점', '트리플'은 그가 대중들에게 로맨티스트로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드라마로 인기를 얻은 그는 영화 '파주'를 선택했고, '파주'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최근 그가 나오는 드라마인 '파스타'도 즐겨보고 있는데, 그의 다음 영화는 어떤 작품이 될 지 기대된다.




서우와 이선균 외에도 심이영은 좋은 배우의 발견이라고 해도 될만큼 멋진 연기를 보여주었고,
이대연과 이경영은 짧은 분량에도 인상깊었다.
항상 느끼지만 이대연처럼 꾸준히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도 없는 것 같다.

임상수 감독의 작품인 '바람난가족', '그때그사람들'에서의 촬영을 워낙에 좋게 봐서 김우형 촬영감독을 좋아하는데,
영화 '파주'는 '안개'라는 테마와 너무나 잘 어울리고, 김우형의 촬영은 이 영화가 '안개'라는 테마와 잘 어울릴 수 있게 한 일등공신이다.

장영규의 음악은 그의 이전작품과는 다른 스타일인데 영화의 스산한 분위기와 너무 잘 맞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다양한 작품을 잘 소화해낼 수 있는 음악감독이 장영규 아닐까.
'복숭아 프레젠트'는 우리나라 영화계의 큰 재산이다.
나 같은 경우에도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음악들의 중요성을 크게 생각하지 않앗는데, 방준석, 장영규, 달파란이 작업한 영화음악들을 들으면서 영화 속에서 음악이 큰 역할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루에 한 편씩 영화를 보자고 결심한 첫 날 '미쓰홍당무'를 보게 되었고, '미쓰홍당무'에서 서우라는 배우의 다른 연기가 보고 싶어서 보게 된 영화가 '파주'였다.
'파주'를 보고나서 결심이 무너졌다.
다른 영화를 볼 수 없을만큼 '파주'의 여운이 길었다.

이선균과 서우가 영화 속에서 각각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내게 너무 큰 의미로 다가왔다.
마치 하나님과 길 잃은 양 한마리를 보는 것 같았다.
'파주'는 내게 종교적인 숭고함을 느끼게한다.
그 숭고함 때문일까, 평생 가도 잊지 못할 여운을 남겨주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