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Movie

암살 (Assassination, 2015)

 

 

 

소재가 영화의 완성도를 결정 짓는다는 식의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천박하다.

역사와 정치 관련 소재에 대한 영화라고 무조건 추앙한다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그러한 태도가 우리 사회를 얼마나 병들게 만들었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일까.

내게 영화는 아이템과 상관없이 완성도와 취향의 영역이다.

 

영화사와 문학사를 살펴봐도 그렇다.

소재가 평가의 잣대라는 그 논리가 참이라면, 지금 당장 예술의 역사는 무너진다.

지금 우리가 걸작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하나 같이 당시에 굉장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작품들이다.

걸작이라고 부르는 예술작품들은 필연적으로 불편함을 동반한다.

누가 봐도 좋아보이는 이야기와 불편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의 무게감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런 면에서 '암살'은 고마운 작품이다.

소재에 있어서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인데 완성도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비슷 소재를 가지고 편협하고, 형편없는 완성도로 풀어낸 작품들이 무수히 많았기도 하고.

 

역사적 메시지가 뚜렷하지만, 역사를 아이템 삼아서 풀어낸 활극이다.

최동훈은 국내에서 가장 글을 잘 쓰는 감독 중 한 명이기에, 최동훈 개인의 필모그래피 기준으로 본다면 밀도가 떨어지는 시나리오이다.

최동훈의 데뷔작인 '범죄의 재구성'이 빈틈없이 꽉 차있는 시나리오라면, '암살'은 상대적으로 빈틈이 많은 시나리오이다.

그리고 그 빈틈을 정서로 채워넣는다.

관객들의 평이 갈리는 부분도 결국 그 정서를 각자 어떻게 채우냐에 달려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최동훈 감독의 웰메이드 영화를 거절할 수 없다.

수많은 스타급 배우들을 불균형없이 조율해내고, 영화적 리듬은 항상 탁월하다.

스타캐스팅을 하는 시스템을 비롯해서 최동훈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지만, 자본이 있어도 각본과 연출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애초에 그들은 출연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금 충무로에서 최동훈의 시나리오를 받고 탐내지 않을 배우가 몇이나 있겠는가.

그가 흥행감독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그가 좋은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이자 효율적인 연출에 능한 감독이기 때문이다.

 

이정재의 연기 중에서 '하녀' 속 연기를 가장 좋아했는데, 앞으로는 '암살'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을만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그의 진중한 말투와 이중적인 캐릭터가 섞이는 순간의 맛이 있다.

전지현은 자기 필모그래피의 2막에 들어왔다.

'도둑들', '베를린', '암살'의 전지현은 충무로에서 원톱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여배우가 되었다.

필모그래피가 어느 순간부터 확 변화한 예를 들 때 항상 장만옥을 들었는데, 앞으로는 전지현을 예로 들어도 될 것 같다.

 

최동훈은 관객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을 알고 있다.

뻔한 현상을 재밌게 말하는, 이야기의 리듬을 너무 잘 아는 감독이다.

난 결국 그가 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궁금해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