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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비밀은 없다 (The Truth Beneath , 2015)

 

결론부터 말하자면 내게 2016년 최고의 영화이다.

올해에 인상깊었던 '곡성'과 '사울의 아들'은 굉장히 훌륭하지만 감정적으로 완벽하게 빠져들었던 영화는 아니다.

'비밀은 없다'는 보는 내내 짜임새를 뛰어넘어서 완벽하게 젖어들었던 영화이다.

 

흥행에서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줬고, 관객들과 평단의 호불호도 명확하게 갈렸고 왜 그런지도 이해된다.

 

이경미 감독의 차기작이라는 것만으로도 기대가 컸다.

그녀의 단편인 '잘돼가? 무엇이든'과 데뷔작 '미쓰 홍당무'는 내게 걸작까진 아니어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충무로에서 전혀 볼 수 없던 새로운 색을 가졌단 것만으로도 그녀의 영화는 특별하다.

항상 여성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두고 사회문제에 대해 짜임새있게 위트있는 분위기로 끌어간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다.

심지어 가끔 다른 영화들에서 특별출연해서 보여주는 연기조차도 너무 좋다.

 

박찬욱 감독은 이경미 감독을 아끼는 것으로 유명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경미 감독은 스크립터를 맡았었고, '미쓰홍당무'는 박찬욱 감독이 제작을 맡았다.

'비밀은 없다'를 보면서 '지구를 지켜라', '올드보이', '복수는 나의 것'을 봤을 때의 감정을 느꼈다.

박찬욱의 향기가 많이 났다기보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이 가진 컬트적인 성향을 보여준 영화가 드물다는 뜻이다.

'비밀은 없다'는 적어도 내겐 철저하게 컬트와 블랙코미디로 기억될 영화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뚝심을 가지고 컬트로 끝까지 밀고 나간 영화를 처음 본 것 같다.

 

'지구를 지켜라'가 연상되는 이유 중 하나는 마케팅 떄문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포스터를 비롯해서 유치해보이는 분위기를 예상시키지만, 굉장히 사회적인 메시지가 강하고 컬트성향이 짙은 영화이다.

 

'비밀은 없다'는 포스터를 보는 순간 손예진의 최근 필모그래피의 몇몇 영화들이 떠올랐다.

흥행과 평단 모두에서 실패한, 진지한 스릴러 분위기의 작품들.

이경미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나조차도 그러한 영화들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실망스러운 부분은 제목이라 제목도 바꿨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많은 관객들은 아마 자신들이 예상한 것과 많이 다르기에, 아니 심하게 다르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배신감이 더욱 클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의 리듬은 기존상업영화의 리듬과는 완전히 다른 엇박이다.

 

손예진의 원맨쇼라고 할 수 있는 영화이다.

손예진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어떤 영화가 떠오르는가.

그녀의 드라마 중에는 '연애시대'라는 완벽한 작품이 존재한다.

이전까지 손예진의 대표영화는 청순한 모습의 '클래식'이었겠지만, 앞으로 그녀는 '비밀은 없다'를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말할 때 반드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극장가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다양성을 생각했을 때,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비밀은 없다'를 훨씬 좋아할 것으로 예상된다.

 

손예진만큼 놀라웠던 것은 김주혁의 연기다.

정말 탁월하게 자신의 몫을 해낸다.

'나의 절친악당들'과 비밀은 없다' 두 편을 통해 김주혁에게 맞는 옷을 찾은 느낌이다.

속물적인 상류층 캐릭터가 그에게 참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주혁에게 정말 중요한 선택이 된 작품들이 아닐까 싶다.

 

선생님 역할로 나온 최유화는 크지 않은 비중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주목해야할 배우라고 생각했다.

이경미 감독이 정말 디렉팅이 좋은 감독이라는 것도 다시 한 번 느꼈다.

김민재는 어떤 작품에 나와도 잘 짜인 연기를 보여준다.

특히 그가 등장한 영화들을 유심히보면,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내세우는 장면에서 김민재는 항상  절정을 보여준다.

 

케이팝스타를 좋아하기에, 아역으로 신지훈이 나와서 깜짝 놀랐다.

이경미 감독이 케이팝스타를 보다가 눈여겨보고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염두를 했다고 한다.

미옥 역을 맡은 김소희의 연기는 성인연기자들에게 결코 눌리지 않고 돋보였다.

손예진과 김소희가 투샷으로 있을 때의 에너지는 굉장하다.

 

신지훈과 김소희 두 배우가 맡은 캐릭터들이 극 중 밴드를 만드는데 분위기가 국내밴드인 무키무키만만수를 연상시킨다.

무키무키만만수의 음악은 실제로도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데, 그러한 분위기와 유사한 음악이 영화의 메인테마로 사용된다.

'비밀은 없다' 영화평에는 음악이 거슬린다는 이야기가 많다.

난 이 영화가 컬트걸작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영리한 음악선곡에 있었다고 본다.

이 영화가 극단으로 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음악에 있다.

 

진지하게 스릴러로 전개되다가도 중간에 뜬금없게 느껴지는 유머, 종잡기 힘든 편집, 낯선 분위기와 음악까지.

이러한 요소들은 극의 괴기한 성격을 더 살려준다.

'비밀은 없다'가 기존 상업영화의 문법대로 갔다면 장담컨데 이 영화는 아무 특색없이 잊혀졌을 것이다.

이경미 감독의 뚝심은 이 영화가 대중적이진 않아도 무척이나 강렬한 영화로 만들었다.

타협없이 이렇게 끝까지 밀고나가고 개봉까지 성공한 이경미 감독은 올해의 감독이라고 할만하다.

 

전사나 캐릭터를 드러내는 방식에서 작위적인 부분도 전혀 없이, 설명을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전개해나간다.

이렇게 잘 짜여진 시나리오도 정말 오랜만이다.

이경미 감독의 강점 중 하나는 꼼꼼한 시나리오인데 그녀의 장점이 여실히 드러난 부분이다.

 

'비밀은 없다'의 최고강점은 플롯이다.

자극적인 요소를 합쳐놓은 막장스토리라고 하는 이들이 많은데, 이렇게 수많은 요소들을 깔끔하게 담아내고 전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엄청난 에너지로 끝까지 돌진한다.

대중들에게 익숙하지 않은 흐름일 뿐이지, 영화를 곱씹어 보고 뜯어볼수록 거의 완벽한 플롯을 가진 영화이다.

한국영화에서 이렇게 개성 강한 여자주인공이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끝까지 달리는 영화를 본 적이 있는가.

 

좋은 영화를 만나면 흥분된다.

최근에 만났던 좋은 영화들은 좋다는 것은 알아도 감정적 동요가 크지 않았는데, '비밀은 없다'는 완전흥분상태로 영화에 푹 빠져서 감상했다.

영화에 푹 빠지고 싶다는 갈증을 단번에 해소할 수 있었다.

 

제발 이경미 감독이 오래오래 영화를 만들어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