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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부산행 (TRAIN TO BUSAN , 2016)

 

연상호 감독의 전작들을 통해서 사회에 대한 날선 비판, 특히 공동체의식의 결여에 대해 말해왔다.

'부산행'은 잘 만든 장르영화인 동시에 짙은 은유가 들어간 작품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떠오른 이유는 영화 속 괴물이 맥거핀이라고 할만큼 큰 주제에 대한 은유이지만 표면적으로는 일종의 재난영화로 관객을 만족시킨 것처럼, '부산행'도 좀비를 내세우지만 그 안의 은유는 좀비물로 치부하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다.


생존을 위해 뛰는 가장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묘사한 김애란의 단편 '달려라,아비'가 떠올랐다. 

'부산행'에서도 부성애를 위해서 뛰는 아버지들은 결국 각종 장애물들로 인해서 비극을 향해 달리게 된다.

자본주의 사회가 만든 '경쟁'이라는 이름의 병은 한 때는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이들을 좀비로 만든다.

그들은 서로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뛰고 서로를 밟고 지나가야 한다.


이미 달리기 시작한 그들은 부산행열차처럼 직진만 할 뿐, 우회나 후진 등은 생각할 수 없다.

생각이 생기고 의식이 생기는 순간 도태된다.

미친 사회에서 벗어날 방법은 범법자가 되거나, 미치거나, 죽는 수밖에 없다.


한정된 생존의 조건 안에서 최대한 많은 이들을 죽이고 자신의 영역을 늘리는 것이 답인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서로 유대하고 공동체의식을 획득한 이들이 한정된 조건 안에서도 생존의 가능성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공동체의 기적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고, 그것은 현 시대에도 시민의식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된다.


생존을 위해 뛰는 부모, 뛰느라 애정을 표현할 시간도 없는 그들은 자신들이 뛰었던 목적이 가족의 생존이었음을 죽음으로 증명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영화가 끝나고, 현 시대의 시민들이 타고있는 자본주의와 경쟁의 열차는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계속해서 직진해간다.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지만 생존을 위해 우리는 또 다시 그 열차에 타고, 그것은 계속해서 대물림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