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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무게 (The weight, 2012)

 

 

 

내 몸이 원망스러울 때마다 춤을 추고 싶었다.

이런 저질스러운 몸으로 무슨 춤이냐, 그렇게 자책하며 춤이 내게는 이룰 수 없는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에, 춤을 추고 싶었다.

인생의 절반 이상은 뚱뚱한 모습으로 살았고, 그 기간동안 내 몸을 원망했고, 춤을 추고 싶었다.

내 자신의 게으름 같은 것을 탓하기에는 외적으로 신경 쓰이는 것이 너무 많은 사춘기였다.

결국 단 한 번도 춤을 추지 않았고, 내 몸이 어떤 모습인지와는 상관없이 이젠 그것이 당연한 사람이 되었다.

 

'무게'는 사람이 짊어지고 태어나는 몸의 무게에 대한 영화이다.

등에 거대한 혹이 난 남자, 일그러진 얼굴의 남자, 여자가 되기를 원하는 남자가 나온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된 자신의 몸으로 인해 삶의 거대한 무게감을 느낀다.

 

눈과 코가 평균적인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척추가 곧게 서있는 이들이라면, 자신이 남성인 것에 만족하는 이들이라면, 그들 삶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볼 수 없다.

아니, 그런 저울 따위 볼 시간도 없이 자기 자신의 몸을 바라보기 바쁘다.

신체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불편한 장면들의 연속인 영화이다.

영화 속 인물들에게는 아주 기초적인 욕망이지만, 우리에게는 너무 당연한 것이라 그들의 욕망은 상식 밖에 있는 몹시 불편한 종류의 것으로 다가온다.

다시 태어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불가능한 욕망을 꿈꾸는 것.

꿈을 이루기 위해 전진해야합니다, 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 것 뿐이다.

 

영화 속에서 춤추는 장면이 판타지로 등장한다.

등에 혹이 있는 이에게 시체들이 살아움직이는 것이나 춤을 추는 것이나 불가능에 가깝다는 면에서는 비슷한 무게를 가진 상상이다.

 

영화 초반에는 과연 어떻게 이 영화를 촬영했을지가 궁금했지만,

영화나 끝나고 난 뒤에는 이 영화의 출발점이 삶의 어떤 장면 앞에서였는지 묻고 싶어진다.

 

날 것에 가까운 영화이다.

불친절한 부분도 많고 과잉된 부분도 있다.

대사가 많지 않지만, 박지아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 대부분은 과잉되어있다.

육체에 대한 영화이기에 몸으로 정서를 표현하는 순간이 훨씬 좋았다.

충분히 인물에 몰입된 영화 후반부에 박지아가 노골적으로 죽음에 대해 말할 때는 대사들이 사족으로 느껴졌다.

 

등에 혹이 난 남자는 시체를 닦는 일을 한다.

누드화를 그리다가 그림의 모델인 여자가 쓰러졌을 때도, 아는 이들이 죽어서 자신의 앞에 시체로 놓여있을 때도, 그는 빵과 우유를 먹을때만큼이나 자연스럽게 움직인다.

죽음이 몹시 익숙해서 죽음의 맨얼굴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 안 할 얼굴을 하고서 말이다.

 

가장 비도덕적인 영화는 사람을 계급화시켜서, 자신보다 낮은 계급의 이들의 삶을 그려내서 관객으로 하여금 위안받게 하는 영화이다.

'무게'를 보면서 내 몸에 대해 만족하고 안심하는 종류의 감흥을 얻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세상에 자기 신체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이 몇이나 있겠는가.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고 싶어서 계속해서 영화를 보는 것일까.

매번 물었고, 그리스비극에서 보여준 것들을 보고 싶어서 영화를 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욕망에 대한 이야기가 보고 싶어서 영화를 봐온 것이다.

 

육체는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있다.

오직 육체만이 삶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육체의 무게에 대해, 삶의 무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린 결국 가질 수 없는 욕망을 향해 전진하는 존재들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허리가 욱씬거렸다.

척추 한가운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지만 몹시 뜨겁게 달궈진 욕망이 다시 한 번 욱씬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