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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환상의 빛 (幻の光 , Maborosi , 1995)


숙면을 취하고 나면 정적인 영화에 도전하고 싶어진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데뷔작인 '환상의 빛'은 이전에 다큐멘터리를 찍던 그의 성향이 묻어날만큼 정적이다.

명작이라고 하는 이도 많지만 내게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라는 이름이 안 붙었다면 더 박하게 평가했겠다 싶을 만한 평작이었다.


다만 인상적인 장면과 물음은 있다.

재혼을 앞두고 이사 가기 전에 사별한 남편과의 사진첩을 오랜만에 다시 보고, 동생 결혼식 때문에 방문한 고향에서 옆집 양장점 아주머니부터 자주 가던 카페 사장님까지 주변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순간들.

그런 순간들은 내 삶에 대입해보게 되는 장면이라 울컥했다.

추억을 돌아보고, 내 추억을 간직한 이들을 재회하는 일.


95년도의 아사노 타다노부는 지금 내 머리 속 이미지가 무색할 만큼 애띤 모습이다.

짧은 등장에도 불구하고 이쿠오는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인 에스미 마키코는 그 존재감이 영화 제목처럼 '빛'에 가까웠다.

어두운 영화 속 상황 안에서도 한 줄기 빛처럼 시종일관 빛났으니까.

재혼한 남편 타미오 역을 맡은 나이토 타카시의 연기도 안정적이다.


자살한 남편에 대해 유미코는 계속해서 의문을 품는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당연히 그 이유에 대해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게 될 것이다.

재혼한 남편이 고향에 돌아온 이유가 자신에게 말한대로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전부인 때문이라는 말을 듣고 환를 낸다.

그 말에 대해서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게 될 테니.


생은 의문 투성이고 질문이 넘친다.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내게 쏟아지는 물음 쪽으로 무게중심을 바꿀 순 없다.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이 아니라 삶에 더 집중해야 한다.

삶에서 그 지점을 발견해야 할테니.

결국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삶으로 질문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국 살아남고 느껴야 한다.

그때 그 사람은 왜 그렇게 했을까.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때로는 답하지 않고 유예해도 좋다.

그저 내가 살아있고 매일매일이 돌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근사한 일 아닐까.

난 그렇게 믿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