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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화양연화 (花樣年華 , In The Mood For Love , 2000)



왕가위 영화를 처음 본 게 거의 10년 전이다.

왕가위에 빠져서 거의 모든 영화를 다 봤다.

데뷔작인 '열혈남아'부터 2004년에 나온 '2046'까지 단숨에 봤기에 어쩌면 작품마다 푹 빠져있을 시간은 부족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화양연화'는 왕가위 감독의 최고작으로 알려져있다.

내게는 그리 큰 감흥이 없어서 내가 이상한가 싶었다.


10년이 지나 다시 본 '화양연화'는 거의 새로운 영화다.

내가 왜곡해서 기억한 장면도 있었고,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숨에 걸작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여전히 내겐 '중경삼림'의 감성이 더 좋다.


장만옥이 너무 아름다워서 감탄했다.

양조위는 러닝셔츠를 입었을 때 가장 멋진 사람 중 하나다.

장만옥의 다양한 의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충분히 가치 있다.

영화 초반엔 단색 위주의 의상을 입다가, 양조위와 가까워진 뒤부터 화려한 프린팅의 옷으로 바뀌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장만옥은 두 번 운다.

남편과의 헤어짐을 연습하면서, 양조위와의 헤어짐을 연습하면서.

두 번 모두 상대역은 양조위고, 옆에서 안아준다.

슬픔을 연습하는 순간에 옆에 있어준 사람,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준 사람.


그들이 사랑을 연습했다면 달라졌을까.

가설을 만드는 일은 겨우 마침표를 찍은 일에 다음 문장을 덧대는 일과 같다.

추억의 흔적들이 마주치면 어느새 새 문장을 적는다.


'첨밀밀' 속 장만옥과 여명에게 등려군의 음악이 특별하듯, 이별을 앞둔 장만옥과 양조위 사이에서 '화양연화'라는 제목의 곡이 흘러나온다.

그들은 서로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을 공유하고,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더 아름답다.


그들은 주변의 이목과 서로의 배우자로부터 반면교사한 부분까지 서로를 속박하는 부분이 많다.

그들이 도망쳤다면 행복했을까.


지금 다시 보니 2046이라고 적힌 양조위의 방 앞 복도는 데이빗 린치의 영화 속 빨간방들을 연상시킨다.

그 빨간방 안에는 사랑에 대한 수많은 표현들이 담겨있을 것만 같다.


장만옥와 양조위를 제외한 인물들은 거의 안 나오고, 등장해도 뒷모습 정도만 나온다.

등장한다 해도 두 사람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할 때만 나온다.

두 사람의 얼굴 클로즈업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두 사람의 표정과 말투 등으로 수많은 디테일이 채워진다.

그야말로 이 영화는 두 배우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 멋진 연기를 담은 작품이다.


비밀이 생기면 나무를 파내서 그 안에 비밀을 말하고 진흙으로 덮듯, 캄보디아 사원에서 양조위는 자신의 비밀을 속삭이고 진흙으로 채운다.

비밀을 말하는 양조위의 뒷모습은 마치 연인에게 입을 맞추는 사람 같다.

그는 장만옥의 삶에 있던 외로운 부분을 충실하게 채워준 사람이다.


비밀을 돌 사이에 심고 진흙으로 채워도, 진흙의 잔해를 따라 그 비밀은 흘러 나올 거다.

그 흙이 일부가 되어 대지가 생겨나고, 누군가는 비밀이 묻어난 대지를 걸을거다.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비밀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

우리 모두 알고 있으니까, 수많은 비밀이 지금 이 순간도 일어나고 있음을.

시간이 지나 과거의 집에 찾아온 장만옥이 양조위의 방을 보자 울컥한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일 거다.


그녀가 걷는 대지 위에서 아무리 태연하게 지나도, 가끔 발목을 시큼하게 할만큼 불쑥 튀어나오는 비밀의 순간이 있을 거다.

사랑이지만 입밖으로 낼 수 없는 순간.

그녀의 마음의 여백에 양조위가 들어선다.

진흙의 잔해처럼 그와의 추억이 새어나온다.

함께 먹던 국수, 그와 만날 순간을 상상하며 고른 의상, 그와 쓰던 무협소설의 장면들.


우린 양조위가 돌에 속삭인 비밀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장만옥은 그 말들을 음절 하나하나까지 알 수 있을 거다.

비밀을 말하고 싶은 마음 안에는 비밀 속 주인공인 그녀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도 있을 테니.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사랑을 말하는 방법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