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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종이달 (紙の月, Pale Moon, 2014)

 

 

 

친구들을 만났다.

우린 무엇을 했나 생각해본다.

 

우린 추억을 만들었다.

무엇인가를 했고 우리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불렀다.

무엇을 했는지 생각해보니 그것은 '소비'였다.

우리는 소비를 했고, 소비를 추억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에 소비가 필요하고 소비가 추억이 되는 시대이다.

세상에서 가장 손쉽게 추억을 만드는 법.

소비를 하는 것이다.

아니,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일은 소비의 범위 안에 존재한다.

휘발적이라고 쉽게 말하기에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세상에서 소비만이 단기간에 행복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말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소비를 비판하는 순간조차도 소비가 필요하다.

소비로 인한 행복을 가짜라고 부르기에는, 그것은 너무 강력한 가짜가 되어버렸다.

진짜를 이겨버린 가짜.

그 순간 우리는 개념정립을 새롭게 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계속해서 가짜라고 비판하면서도 두 손에 쥔 가짜를 놓을 수 없는 것은 왜일까.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인가.

진짜로 가는 길, 그 다리와 입장권 모두 소비가 필요하다.

가짜를 통해 진짜로 입장가능 하다면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일까.

우리의 추억 안에 무엇인가를 추가하기위해서는 소비가 필요하다.

다소 심한 비약일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지금 쉬고 있는 숨조차도 소비로 환원된다.

 

'종이달'은 최근 본 일본영화 중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이다.

나카시마테츠야 감독의 영화에서 과잉된 부분을 빼고, 구로사와기요시 감독의 영화를 조금 더 감정적으로 풀어낸다면 요시다다이하치의 지점이 나오지 않을까.

사회비판적인 메시지를 흡입력있는 영화적 리듬으로 풀어내는 감독이다.

각본과 편집이 워낙 효율적이고 영리하게 짜여진 탓에 과잉될 수 있는 부분은 은유적으로 풀어내고, 피 한 방울 안 나옴에도 굉장히 스릴 있게 느껴진다.

 

영화 초반은 신경숙 소설처럼 흐르나 싶었는데 중반부에 본격적으로 돈놀이하는 부분부터는 보는 내가 더 불안해졌고, 후반부에 가서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기성찰을 하게 한다.

무채색으로 음악없이 전개되는 전반부와 밝은 톤의 음악과 컬러풀한 러브호텔을 배경으로 한 배드씬의 대비는 주인공의 일탈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배드씬의 분위기는 사라폴리의 '우리도 사랑일까' 속 놀이기구 장면처럼 화려해보이지만 그 순간이 끝난 뒤의 공허함을 내포하고 있어서 보는 내내 달콤해 보이기보다 위태롭게 보였다.

 

인과관계도 완벽하고 모든 것이 설명되는 영화인데 보고나면 별 감흥없는 영화들이 있다.

오히려 설명도 되지 않는 장면도 많은데 이유없이 매혹적이고, 관객이 채울 수 있는 여백이 많은 영화들이 걸작이 되곤 한다.

우리 삶은 실제로 인과관계로 설명되지 않고, 이유없이 매혹당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종이달' 또한 그렇다.

분명 완벽하게 잘 짜인 극은 아니지만 매혹적이다.

주인공의 일탈은 불륜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구체적 사건보다 충동의 연속이라고 설명하는게 더 설득력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증식되는 욕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는 모습이 현대인에게는 흔한 모습이 되었다.

 

그녀가 어린 시절 기부했던 것과 아버지의 지갑과 고객의 통장에서 훔친 것과 고급호텔에서 지불한 것들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을까.

그것들은 무척이나 다른 결과를 가져왔지만 결국 같은 뿌리 안에서 나온 것들이 아닐까.

 

미야자와리에는 덤덤하게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역할 자체가 너무 튀어서 돋보이는 연기가 아니라, 덤덤하고 정적일 수 있는 캐릭터를 안정감 있는 연기로 돋보이게 하는 것은 내공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어릴적 화보집으로 유명했던 아역배우였던 미야자와리에는 이제 영화제에서 환영받는 배우가 되었다.

그녀의 필모그래피는 점점 장만옥을 닮아가는 것 같다.

 

이와이슌지의 '4월 이야기'로 많은 이들을 가슴 떨리게 했던 다나베 세이치가 이젠 아저씨 같은 차장님 역할로 나오는 것을 보며 세월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낀다.

'카모메식당'의 고바야시 사토미를 정말 좋아하는데, 이 영화에서 미야자와 리에와 함께 영화의 다른 축이 되어서 안정감을 더한다.

 

'종이달'은 일본에서 '한때 행복했던 시절'을 뜻한다고 한다.

영화 속에서는 돈을 상징하기도 한다.

돈을 가짜이고 껍데기라고 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가짜종이가 우리의 관계를 이어주기도 끊어주기도 한다.

진짜보다 커진 가짜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구로사와 기요시의 '큐어'와 요시다다이하치의 '종이달'은 서로 톤만 다를 뿐, 똑같이 사회의 불안함에 대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미쳐가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자세란 무엇일까.

어설픈 희망을 말하는 영화들보다 위에 언급한 두 영화처럼 현실적인 영화에 훨씬 더 많은 애정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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