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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일대종사 (一代宗師 , The Grandmaster , 2013)



사랑하는 이를 오랜만에 만난다면 단숨에 달려가게 될까.

막상 그 순간이 되니 오히려 주춤하게 된다.

왕가위 감독의 '일대종사'가 내게 그랬으니까.

내게 영화의 첫사랑과 같은 그의 신작을 오랜만에 보는 건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일이었다.


'일대종사'를 보면서 가슴 벅찼던 이유는 내가 보고 싶었던 왕가위의 지점들이 영화 안에 담겨있었다는 거다.

'화양연화'의 변주로 보이는 사랑의 무드, 이미지로 만드는 서사, 서정을 자아내는 화면의 디테일, 촬영과 음악까지 그동안 그의 전작에서 곱씹던 지점을 신작을 통해 봐서 마음이 좋아졋다.


무공을 지키고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지킨다'는 것의 가치에 대한 영화다.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가치 있는 것을 지키려 하고, '일대종사'에서는 그게 바로 무공이다.


필립 르 소드의 촬영은 크리스토퍼도일 못지 않게 매혹적이었다.

미술과 편집에 있어서 장숙평의 손길이 화면에서 느껴진다는 것만으로도 뭉클했다.

'화양연화'와 '2046'의 음악도 맡았던 우메바야시 시게루의 음악은 굉장히 다양한 테마가 적절하게 쓰였다.


장쯔이의 가장 대표작이라고 할만하다.

편집 논란이 있었을 만큼 양조위의 분량이 주연치고 그리 많지 않고 장첸은 뜬금없이 느껴지긴 하지만, 그만큼 장쯔이의 비중이 큰 영화다.


장쯔이와 양조위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무술로 대립한다.

그리고 잠시 스치는 그 순간에 사랑을 느끼고, 그 순간은 마치 '아비정전' 속 장국영와 장만옥의 시간을 연상시킨다.

삶을 지탱해주는 아주 단단한 찰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한다.


후반부에 장쯔이가 양조위에게 고백하는 장면은 왕가위 장면에서도 손을 꼽을 만큼 아름다워서 울컥했다.

그녀가 삶에서 사랑을 비롯해서 수많은 것을 포기하고 얻은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무엇이라도 가치 있는 삶이다.

그녀의 대사처럼 후회 없는 삶이란 재미 없을 테니까.

상실의 연속이어도 전진할 수 밖에 없는 삶의 숭고함, 희생으로 지켜온 어떤 가치에 대한 메시지는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송혜교는 중국어 대사를 다른 사람 목소리로 더빙해서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아예 대사 자체가 별로 없는 설정의 캐릭터였다.

장첸은 설명 안 되는 부분이 많지만, 무예를 남기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 중 한 축이라고 합리화 하면서 애써 개연성을 만들며 봤다.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이 무협 영화이지만 무협보다 드라마를 강조하듯, '일대종사'도 무공에 대한 이야기지만 결국 드라마다.

원화평의 무술은 멋지지만, 무술보단 드라마에 훨씬 더 눈이 갔다.

순간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클로즈업이나 느린 화면으로 보여주는 화면연출은 왕가위가 최고다.

어떤 화려한 액션시퀀스보다도 좋다.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처음 본 게 벌써 10년 가까이 되어서 그의 전작들을 다시 봐야겠다고 느꼈다.

'일대종사'를 시작으로 다시 보기 시작할 건데, 얼만큼 다른 감흥을 줄지 궁금하다.


무술에 대해 말하지만 결국 사랑에 대한 말한 것처럼, 왕가위는 다음 작품에서 어떤 소재로 사랑을 말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