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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영 어덜트 (Young Adult , 2011)

 

 

제이슨 라이트먼 감독의 작품이기에 봤다.

샤를리즌 테론의 원맨쇼라고 할만큼 그녀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영화이다.

그녀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들이 '몬스터'와 '매드맥스'인데, 그녀는 항상 외롭고 힘들게 투쟁하듯 살고 있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서 그녀가 사랑을 듬뿍받는 역할을 하는 것을 보고 싶다.

 

영 어덜트 장르의 소설을 대필하는 그녀는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길 원한다. 

그래서 자신의 가장 빛낫던 시절을 함께한, 과거의 남자친구와 재결합을 꿈꾸며 고향으로 떠난다.

문제는 그녀의 전 남자친구는 딸을 출산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는 유부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겉보기와 다르게 자신을 원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그에게 찾아간다.

 

그녀의 이런 사고방식이 신기한 동시에 공감되었다.

자신을 과거의 화려한 시절에 가둬놓고, 자신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과 동일할 것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한다.

그래야만 자존감이 서기 때문이다.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자신의 과거는 빛났기에 그 시절에 자신을 묶어두고 현재의 자신을 보지 않는다.

그 시절의 그녀는 빛났기에, 그가 유부남이고 뭐고 자신을 보고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이 동네는 비린내나고 촌스럽고,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향을 부정하는 그녀의 모습은 자신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에게 고향친구가 있다. 

그녀가 키스를 날리던 남자들에게 구타당해서 다리를 절며 평생 살아가야하는 남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녀 삶의 범주에 속하지도 못하는, 계급적으로 자신과 어울릴 수 없는 그에게는 무척이나 솔직해진다.

그에게까지 품위를 지킬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솔직함은 결국 치유의 계기가 된다.

그녀가 유일하게 솔직할 수 있는 곳, 그녀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 곳은 그뿐이고, 그렇기에 그들은 소통에 성공하고 그녀는 치유의 지점에 다다른다.

 

그녀는 영원히 자신과 이성적 감정이 없을 것 같던 그와 관계를 맺고 다음날 일어나서 그녀를 옹호해주는 그의 동생을 만난다.

그의 동생은 그녀에게 철저하게 맞춰주며 자신의 동네를 부정한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러지 말라고 말하지만, 어느새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을 다른 동네로 데려다달라는 여자에게 말한다.

너는 이 동네와 어울린다고.

그녀는 또 다시 자신과 마을을 분리시킨다.

화합에 실패한다.

 

그녀의 차는 음주운전으로 앞범퍼가 나간다.

앞범퍼가 나간 차를 끌고 그녀는 호텔에서 체크아웃하고 나간다.

호텔에 방키를 반납하자 프론트직원은 말한다.

키는 반납할 필요 없다고.

명예회원을 위한 도너츠를 입에 물고 그녀는 나간다.

그녀에게 고향에서의 추억을 반납할 수 없는, 영원히 품고 다녀야할 것이다.

그녀는 명예회원 도너츠처럼, 그 고향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 품고 가고 싶어한다.

 

나간버린 앞범퍼처럼, 그녀는 고향에서 또 다시 상처를 얻고 간다.

그 상처는 스스로가 만든 상처이다.

그녀는 도시에 돌아와 나가버린 앞범퍼, 가릴 수도 없이 선명하게 나버린 자신의 상처를 응시한다.

그녀는 차의 앞범퍼를 갈아버릴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낮은 자존감은 결국 채우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요즘도 소설 잘 나가냐는 말에 힘든 현실 대신 감당 안 될 만큼 잘 팔린다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결코 남처럼 보이지 않았다.

현대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자존감을 연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맷의 여동생에게 행복을 찾기 너무 힘들고, 남들은 행복해보인다고 한다.

그녀는 보이는 것만 볼 뿐, 타인의 사정이나 내면 등에는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랜만에 버디를 보러가는 길에, 버디의 사정 따위 개의치 않고 네일아트를 받고 화장을 하느라 바쁘다.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것은 참으로 편한 방법이다.

자존감도 마음대로 높일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해주고, 자신의 생각을 지지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에서의 도태를 뜻하기도 한다.

역지사지가 되지 않는 사람의 끝은 결국 사회에서의 추방이다.

 

결핍이 만연한 사회에서 자존감을 가지고 행복해질 방법이, 세상에 대한 자기중심적 해석으로 연결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사회는 그런 이들에 대해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사람들은 파티에 온 그녀를 못 마땅하게 보고, 심지어 그녀의 목적이 된 버디도 그녀를 부를 생각이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게 연민을 가지고 그녀를 가장 이해해준 것은, 그녀가 자신의 적이라고 생각한 버디의 부인이다.

과거의 머무르는 그녀와 달리, 버디의 부인은 남편의 과거연인인 그녀에게 질투를 가지기는커녕 오히려 연민을 가지고 보듬어주려는 시도를 한다.

파티에 온 모든 이들이 그녀를 이상하게 보지만, 버디의 부인은 그녀와 충돌하고 대화한다.

그것이 공동체가 가져야할 소통이다.

 

처음에는 삐걱거릴 것이다, 사회에 이탈했던 개인이기에.

하지만 함께 부딪치고 호흡을 맞춰야하는 것이다.

하얀 드레스에 묻은 포도주처럼 처음에는 더럽고 빨아야할 것처럼 보이는 그 충돌이, 결국 하얀 드레스를 아예 포도빛드레스로, 그녀와 공동체를 엮어주는 색이 될 것이다.

 

그녀의 마음을 유일하게 아는 맷은 집에 가내수공업으로 양조장을 만들어뒀다.

게이처럼 보인다며 마을에서 배척당하고 여전히 연민의 대상 이상으로 존재하기 힘든 그에게 피규어 색칠과 양조 작업은 그에게 자존감을 키워주는 작업이다.

자신에게 자신의 역할을 부여하는 것, 그것이 그가 스스로를 견디게 하는 방식이다.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부정당했다고 무기력해하는 것이 아니라, 양조와 피규어와 같은 자신의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풍경을 보며 코웃음 치는 그녀는 애초에 타인의 세계에 대해 별 관심 없다.

오로지 자신의 세계가 좀 더 빛나기를, 다른 이들은 그 세계에 대해 박수쳐주기를 바랄뿐.

 

제이슨 라이트먼이 보여주는 현대인의 결핍이 좋다.

지금 내가 가장 이야기하고 싶은 감독은 제이슨 라이트먼이 아닐까 싶다.

내 결핍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내 결핍을 스스로 목격해야할텐데, 그의 영화를 통해 나 스스로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당분간은 그의 영화 속 장면들을 자주 보게 될 것 같다.

 

디아블로코디가 각본을 썼는데, 완성도 자체는 '주노'가 더 좋지만, 충분한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각본이다.

제이슨 라이트먼을 볼수록 가장 많이 떠오르는 감독은 알렉산더 페인이다.

인물들의 결핍, 결핍된 인물들과의 유대를 보면 특히 그렇다.

 

마이크 리의 '세상의 모든 계절'에 나오는 레슬리 멘빌의 캐릭터가 가장 많이 떠올랐다.

자의적 해석으로 세상을 사는 민폐캐릭터.

그럼에도 연민이 생길 수 밖에 없는.

 

'영 어덜트'는 내게 만점 짜리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처한 상황 등과 어우러지다보니 그 어떤 영화보다도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영화가 되어버렸다.

확실한 것은 당분간은 제이슨 라이트먼에 대해 기억하는 시간이 길어질 것 같다.